한 민족 집단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그 집단 성원들 사이의 일체감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의 하나로 우리는 흔히 사회적으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의례(儀禮)를 꼽는다. 여기에는 소위 통과의례(通過儀禮)의 가장 대표적인 관혼상제(冠婚喪祭)와 연중 주요 세시의례(歲時儀禮)들이 포함되며 그것들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문화적 정체의식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
의례(儀禮)는 사회 구성원들의 지위를 변화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그 변화를 인식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즉 통과의례(通過儀禮)의 하나인 혼례(婚禮)는 개인이 그 사회 내에서 한 지위로부터 다른 지위로 이행하는 것을 확인하고 또한 그 지위를 보호해 준다. 이러한 혼례(婚禮)는 한국에서는 관혼상제(冠婚喪祭) 사례(四禮)의 하나로 행해져왔고, 이것은 유교 사회인 조선시대에 이르러 하나의 규범(規範)으로 정착, 제시되어 왔다. 한반도에 한민족이 정착한 이래 고대사회에서부터 현재까지 한국 혼례(婚禮)의 역사는 매우 오래 되었지만 혼례(婚禮)도 민간 생활 속에서 조금씩 변화되어 온 하나의 풍속이기에 언제, 어떻게 변했는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전통혼례(傳統婚禮)라 함은 민간 생활 속에 행해진 혼례 절차와 조선조에 이르러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유교식 혼례 절차가 결합되어 한국적인 것으로 정착된 것을 지칭한다.
한국의 전통 혼례 절차는 의혼, 납채, 납기, 납폐, 본의례, 우귀로 구분하였다. 의혼(議婚)이란 중매자를 통하여 혼인에 필요한 여러 사항을 듣고 이를 참고하여 혼인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다. 납채(納采)란 혼서와 예물을 쾌히 받아들임으로써 신랑측에서 해온 청혼을 허락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납기(納期)는 혼인날을 택일해 보내는 절차이고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예물과 편지를 함에 넣어 보내는 절차를 납폐(納幣)라 한다. 이것은 허락해 준데 대한 신랑측의 감사의 예로써 일정한 격식을 갖추어 정중하게 시행되었다. 신랑이 여가에 가서 혼례를 행하는 절차는 본의례(本儀禮)라고 하고 우귀(于歸)는 신부가 신랑을 따라 시댁으로 들어가는 절차다.
한편 러시아 한인 사회의 역사는 1860년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의 약 150년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에 정치 이데올로기의 큰 변혁과 거주 지역의 대이동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연해주에 정착한 한인들은 당시 러시아 짜르 황제의 지배를 받아야 했으며, 그 다음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엔 한인을 포함한 러시아내 소수 민족들을 급속히 러시아화하려는 스탈린식 사회주의 정책이 실시되어 한인들 역시 이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러시아 정교의 보급과 러시아 국적, 시민권의 확대 보급과 같은 정책들의 실시로 나타났고, 특히 한인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없도록 러시아 사회 속에 한인 들을 따로 분산시켜 우수리강 해안을 따라 한인 가정들을 흩어 놓음으로써 점차 전통 한인 사회의 공동체 문화는 붕괴되었다. 이 정책은 그 어떤 정책보다 빠르게 한인들의 민족 문화가 사라지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할린 한인들은 '큰땅' 한인들, 즉 러시아의 다른 한인들과는 달리 일본에 의해 1943년~44년에 강제징용(强制徵用)으로 주로 남한에서 끌려간 사람들과 그 자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자발적(自發的) 이민이 아니었기에 특히 1세의 경우는 대부분 얼마 후면 귀국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매우 오랫동안 사할린 한인들은 러시아, 즉 당시 구소련의 시민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들의 자손 역시 러시아의 시민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은 러시아 영내에서의 여행이나 이주의 자유를 제한 당했을 뿐 아니라 외국인이나 혹은, 포로와 같이 다른 권리들도 박탈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들로 인해 사할린 한인들은 러시아 대륙, 즉 '큰땅'에서 격리된 채 섬에 고립되어 살게 되었다. 또한 이로 인해 사할린에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고유의 민족 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으며 변화를 적게 겪을 수 있었다.
중앙 아시아는 러시아 내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물론 중앙 아시아의 한인들은 섬이 아닌 '큰땅'이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사할린의 한인들보다는 러시아나 구소련의 대소수민족 정책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농경문화(農耕文化)를 바탕으로 하는 한인들은 결속력 있는 공동체 사회(共同體 社會)를 형성했다. 특히 벼농사가 불가능한 중앙 아시아의 기후 조건을 극복하고 벼농사를 전파한 한민족의 저력에는 러시아 정책 당국자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사회 속에서 전통적인 가족 문화를 고수하며 민족 문화를 지켜 나갈 수 있었다.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 행해지는 전통 혼례는 크게 세 단계에 따라 진행된다. 약혼, 혼례식, 그리고 혼례 이후 신랑집에서 치르는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전통혼례에서 의혼(議婚)의 개념과 유사한 약혼(約婚)은 양가 부모들이 만나 공식적으로 두 가정이 하나가 될 것을 약속하는 절차다. 약혼 이후에 본격적으로 혼례 준비가 진행되고, 마침내 혼례식(婚禮式)이 치러진다. 그리고 이 단계가 끝나면 신랑이 신부와 함께 신랑의 집으로 돌아가 신랑 부모님 및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고 신랑의 집안에 신부가 영입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한국의 전통혼례와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 시행되는 혼례 사이에는 형식(形式)에 있어, 또한 그 본질적 (本質的) 내용에 있어 상당히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특히 러시아 한인 사회에 서 혼례의 본질적(本質的)인 의미는 잘 보존돼 있으며, 그러한 의미는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러시아 한인 사회의 문화 속에는 러시아 문화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하고, 이것은 곧 혼례 절차 속에 상당 부분 반영이 되었다. 따라서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 시행되는 혼례는 한국적 특징과 러시아 문화적 특징이 혼재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편 점차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러시아 한인 사회의 신세대들은 대도시로 나가길 희망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으며, 이로 인해 고유의 전통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 멀어지게 되면서 이들의 혼례 문화에도 점차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또한 현대화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전통 혼례가 변화를 겪으며 서구식으로 점차 바뀌고 있듯이 러시아 한인사회에서도 혼례 절차는 점차 현대화되고 있다.
그러나 절차상의 큰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전통혼례와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 행해지는 혼례는 그 본질적 의미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