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인천 및 차이나타운 거주 화교(華僑)들이 어떤 방식으로 공간과 장소를 인지하고 실천하는지에 대해 연구함으로써 구체적인 화교사회 변화의 메커니즘과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세기말, 한반도의 격동기에 인천의 청국 조계지를 통해 한국사회에 첫발을 디딘 화교들은 일제시기까지 경제적 부흥기를 거치기도 했으나 1948년 한국정부 수립이후 한·중간의 단교 및 1960년대의 강력한 민족주의 정책에 의해 침체되기 시작했으며 점차 억압받고 차별받는 소수집단의 삶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1992년 한중수교 및 1997년 IMF외환위기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외국인 투자유치의 필요성에 대한 교훈을 일깨웠으며 화교사회를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 그동안 차별적이던 법과 제도가 획기적으로 개편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화교들의 질곡과 부흥의 삶의 현장은 인천 화교사회라는 사회적 공간과 차이나타운이라는 장소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인천 화교사회는 차이나타운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넘어선 일종의 ‘공간적 엔클레이브’(spatial enclave)를 형성하고 있으며, 사회적 관계 및 지위, 상호 경제적인 활동도 이 도덕적인 공동체적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특징을 가진다. 이 사회적공간의 주요한 문화적 원리는 ��시(關係, guanxi), 런칭(人情, renqing), 미엔쯔(面子, mianzi), 빠오(報, bao)로 대표되는 화교들이 인지해온 모국의 기본 원리들이며, 결혼식, 장례식 등 가족행사에서 뿐 아니라 후이(會, hui)와 식사초대(請客, qingke)와 같은 경제적, 정치적 실천방식을 통해 화교사회의 삶 전반을 지배해왔다.
인천 화교들의 이러한 공간적 인식은 청국인들이 한국에 이주하기 시작했던 구한 말 조계지에서부터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 화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은 역사적으로 1884년 국제 조약에 의한 ‘합법적’ 영토인 조계지를 통해 처음 한국에 들어왔으며 한일합방 이후인 1913년 조계지가 폐지되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영토에서 흩어지는 양상, 즉 내부적인 디아스포라를 겪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한국정부에 의한 외국인 토지법과 도시개발로 인해 공동체적 화교 촌락들은 거의 모두 해체되었으며 화교들은 대부분 직종을 요식업으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도시의 각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후이(會)나 결혼식, 장례식, 연례행사 등을 통해 모여 자신들의 공동체성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즉, 한국 화교들은 ‘영토에 근거한 공동체’에서 점점 ‘공간적 공동체’로 삶의 방식이 바뀌어온 것이다. 한국 화교들이 거주국 내에서 그동안 간절히 원했던 것은 바로 합법적인 영토였으며, 거주국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들의 문화를 모국과 한국정부가 보호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의 단일한 민족주의 정책은 한국 화교들의 삶을 점점 더 빈곤하게 만들었으며, 자신들의 보호처가 되어야할 모국은 공산화되어 한국정부와 단교했고, 국적국인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점차 지위를 잃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거주국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던 요식업종으로 삶의 기반을 마련해야 했던 화교들은 그동안 거주국에서 지녀온 문화적 자존심마저 잃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이러한 한국 화교들에게 새로운 전기(轉機)가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한중수교에 이은 1998년의 외국인토지법의 개정 및 차이나타운의 개발이었다. 특히 차이나타운은 비록 거주국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관광자원을 창출하기 위해 만든 특수한 구역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화교들에게 있어서는 에스닉 집단의 특수성을 인정해 주는 일종의 합법적인 ‘영토’로 인식되었다. 그동안 잃고 살았던 영토감각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화교들은 차이나타운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적 질서를 만들고자한다. 그러나 현재 차이나타운은 거주국 국민들과 잡거하지 않았으며 치외법권이 있던 과거 ‘조계’ 혹은 ‘청관거리’와는 다르다. 과거 청관거리 혹은 중국동네로 불렸던 선린동 일대의 중국 조계지 일대는 일제시대 이후 한국사회의 민족주의 정책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쇠락을 거듭해온 곳이며, 일제시대 이후 한국인 주민들의 거주지였던 과거 청관거리 옆 북성동 산동네 역시 부근의 어항 및 어시장으로 인해 여관과 술집이 들어찬 환락가가 되었다가 1970년대 중반 어시장과 부두의 이전으로 인해 침체되기 시작했던 곳이다. 쇠락과 침체라는 공통점은 가지고 있으나 한국인과 중국인의 거주지라는 상이하고 배타적이기까지 한 이 두 경관은 1998년부터 가시화된 차이나타운 재개발을 통해 경합되고 협상된다. 이 둘의 경관에 대한 점유 의지는 과거와 무관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경관을 발명하고자 하는 지방정부의 정치·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점점 더 복잡성을 띠게 된다. 화교들은 거주국 정부에 의해 생겨난 합법적인 차이나타운이라는 공간에서 그동안 거주국의 차별과 억압에 침묵해야했던 일반적인 소수자에서 벗어나 ‘특별한 종류의 소수자’가 된다. 이들은 차이나타운 내의 다양한 집단들과의 협상과정에서 근대 국가들이 그동안 사용해왔던 정치적 방식을 사용하는데, 외부적으로는 인종적 차이의 강조, 내부적로는 경계의 설정과 같은 전략들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화교들은 차이나타운 내에서 자신들의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차이나타운에서의 이러한 화교들의 전략은 각기 다른 접촉과 상황 속에서 정체성 혹은 에스니시티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한국사회 및 동아시아의 특수한 역사적·문화적 맥락에 보자면 한국 화교들은 이민자들의 동화를 통해 국가를 완성시켜가야 하는 미국의 경우와도 다르며, 근대 서구의 지배에 의해 국가경계가 획정되었던 다문화적인 동남아시아 각국의 화인들과도 다르다. 한국 화교들은 한국사회에서 시민권이 아닌 보다 특수한 성원권을 요구하고 있으며, 한국사회 또한 한국 화교를 단순한 소수자가 아닌 한국과의 중요 교역대상국인 중국대륙 및 전세계의 화인(華人)들을 중개할 수 있는 문화적 중개자로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한국 화교들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단순한 소수자에 대한 배려의 차원이 아닌 보다 다양한 맥락과 특별한 관점이 요구되며, 이들의 특수한 역사 및 시각을 고려한 세밀한 정책의 수립이 요구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