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김종삼 시를 대상으로 그의 시에 나타난 시간과 공간 인식의 시적 의미구조를 해명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만큼 시인의 세계인식과 존재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제재이다. 특히 김종삼 시의 시간과 공간은 195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아래 놓여 있어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김종삼은 전쟁과 분단이라는 민족적 수난을 뼈저리게 겪었을 뿐만 아니라 실향민으로서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이러한 삶의 체험이 특히 시간과 공간 이미지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에 본고에서는 시간과 공간 이미지에 투영된 시인의 인식을 통해서 김종삼 시의 의미구조를 살펴보았다.
전쟁은 인간과 그의 존재양식에 대한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거나 전복시켜 버린다. 그 때문에 전쟁의 참상(慘狀) 속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랜 시간 동안 그 여파가 미치게 마련이다. 일차적으로는 크나큰 고통에 직면하게 되며, 그리고 종국에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인식과 열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참화(慘禍) 속에서 살아남은 김종삼은 이러한 인간적 고뇌를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시화하려고 노력한 시인이기에 그의 시에는 그에 결부된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한다.
김종삼 시에 드러나는 시간과 공간 인식을 집약하면, 크게 두 개의 차원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비극적 현실(시간과 공간)을 인식한 결과로서 세계와 자아의 상실에 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대응하는 일종의 극복의 양식에 관한 문제이다. 구체적으로 단절과 소외와 부정적 인식이 전자에 관련된 것이라면, 방황과 도피와 초월적 인식은 후자와 관련된다. 또한 전자가 원인으로 작용한다면 후자는 그에 대한 대응의 양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그의 시적 사유의 뼈대가 될 만큼 그의 시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이를 집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종삼의 시간인식은 두 개의 범주로 대별된다. 현재시점에서 바라보는 과거의 경험적 시간과 과거시점에서 바라보는 현실적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부정적인 현실인식이 과거의 경험적 시간까지 부정하는 경우와. 이미 경험한 과거의 시간이 부정적이므로 현재와 미래까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포괄한다. 김종삼 시에서의 시간인식은 이 두 범주의 시간적 속성이 상호작용하면서 그의 시세계의 근간을 이룬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 및 미래의 시간은 상호 영향관계를 맺으면서 고리를 형성한다.
시간인식은 특히 전쟁에 관련된 그의 체험적 요소가 작용하여 세계와 자아 상실이라는 비극적 인식을 함유한다. 그리고 상실의식의 근저에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 ‘상처’가 시적으로 다양하게 변용되어 그의 부정적인 세계인식과 비극적 자아의식으로 발산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그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상처’는 ‘기억’을 매개로 하여 그의 시의식을 자극하고 지배한다. 다시 말해 과거 경험적 시간들이 소멸되지 않고 그의 현실적 시간에 재생된다. 이러한 비극성의 연계와 지속에 대한 인식이 바로 김종삼 시에 나타난 시간인식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김종삼 시에 드러나는 공간인식은 부정적 현실에 대한 일종의 대응의지라는 속성을 갖는다. 그의 시간인식이 부정적으로 연속되는 시간을 단절시킴으로써 현재로부터 도피하거나 결핍된 현실인식을 무화하려 했다면, 공간인식에는 공간이동을 통해서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초월하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부정적인 현실공간으로부터 이상적 공간으로 이행하고 싶은 지향의지가 그 바탕에 잠재해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공간인식은 크게 도피와 초월 공간(현실회귀)이라는 두 개의 범주로 구분된다.
김종삼 시에서 도피공간의 특성은 첫째로 현실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고자 하는 의지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여기에는 ‘떠남’과 ‘떠돎(방황)’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도피의식은 세계를 황야로 인식하는 데서 연유한다. 황야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평화와 자유와 순수가 사라진 공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실공간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김종삼은 도피의지를 갖게 되는데, 도피처로 인식되는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은 부정적 현실공간의 대척점에 놓이는 이상향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적 고통을 견디려는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김종삼의 도피의식에 대한 반성적 결과로서 현실에 대한 재인식을 통한 회귀와 초월적 의지가 대두된다. 이는 그의 도피공간이 자기 방어기제로서는 일정 부분 기능을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정화와 극복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도피 여정이 결국 허무주의로 빠지고 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 기인한다. 여기서 그는 또 다른 공간에 대한 탐색을 시도한다. 이것이 바로 현실회귀를 통한 존재초월의 단계이다.
현실로의 회귀, 또는 존재초월의 단계는 ‘자기 방어적 떠돎’에서 ‘현실 수용적 자세로 돌아옴’의 형식을 의미한다. 이는 ‘먼 곳(외부)’로 떠돌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 진정한 자기세계로 돌아옴을 의미한다. 내부 지향의지와 관련된 것으로 순수 예술지향이나 휴머니즘에 대한 인식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그는 세계와 자아를 새롭게 인식하고 현실 속에서 출구를 찾으려 하였다. 이러한 그의 심리적 변화는 세계와 자아의 불화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김종삼 시에 드러나는 시간과 공간 인식의 흐름은 대체로 위와 같은 특성과 변화과정을 보여준다. 흔히 그는 일생 시류(時流)에 연연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하는 데 매진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사실 그의 작품의 의미구조를 통해서 볼 때 그는 현실과 존재 인식에 관한 한 매우 큰 고통과 갈등과 고뇌에 휩싸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실적, 존재론적 고뇌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성취하는 원동력이자 현실적 고통을 이겨내는 방식이기도 했다. 요컨대, 전쟁과 분단 체험을 핵심으로 한 비극적 현실인식과 그 대응의지에 대한 다양한 시적 분출은 시인 김종삼이 현실적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이자 그것을 시적으로 승화해내려는 치열한 시의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김종삼이 우리 시사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는 근원이 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