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국왕태봉(國王胎峰)은 능묘(陵墓)에 준하는 절차에 의하여 엄격하게 선정 관리되었다. 왕실 자·녀의 태를 안장하는 태봉(胎峰)은 동기감응(同氣感應)에 의한 풍수적 소응(昭應)에서 시작되었으며, 특히 국왕의 태봉(胎峰)은 일종의 통치이데올로기로도 작용하였다.
조선왕조에서 적장자(嫡長子)가 실제 왕위에 오른 경우는 27명의 국왕 중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 7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20명은 적장자계승(嫡長子繼承)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왕실에서는 이들 왕들이 정통성을 인정받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태봉풍수(胎峰風水)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풍수이론에서 음택풍수는 조상의 체백을 길지에 매장하여 땅의 생기를 받고, 이것이 후손과의 감응을 통한 발복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태를 매장하는 태봉풍수(胎峰風水)는 당사자의 태(胎)가 길지의 생기(生氣)에 감응(感應)하여 본인이 발복한다는 양택풍수의 발복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이처럼 태봉(胎峰)은 직접적인 풍수사상의 영향이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구는 대부분 고미술사학이나 역사학, 민속학적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풍수지리학적 연구는 드문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는 조선왕실의 약300여기에 달하는 태봉 중에서 위치확인이 가능한 22명의 국왕태봉을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국왕태봉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대부분 1등지 태실이고, 돌혈(突穴)명당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전기에는 산중돌혈 후기에는 평지돌혈로 입지양상이 다른 2가지 유형을 비교할 수 있다. 또한 국왕태봉과 왕릉의 풍수적 특성을 상호 비교하여 각 특징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풍수이론 중 형세론(形勢論)을 중심으로 문헌기록과 현장답사를 병행하면서 분석하였다. 그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왕태봉은 전기에서 중·후기로 갈수록 장풍국의 산중돌혈에서 득수국의 평지돌혈로 옮겨가는 양상을 띠고 있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충청·경상·전라도에까지 분포되어 있다.
둘째, 대부분 용세(龍勢)는 비룡입수(飛龍入首)로 기세가 왕성하고, 국세(局勢)는 안정되어 있다. 수세(水勢)는 유정하면서 용수배합(龍水配合)을 잘 이루고 있다.
셋째, 대부분 혈장사신사(穴場四神砂)인 입수두뇌(入首頭腦), 청룡선익(靑龍蟬翼), 백호선익(白虎蟬翼), 전순(氈脣) 등과 귀성(鬼星), 요성(曜星), 관성(官星)의 삼성(三星)을 갖춘 1등지 태봉에 입지하고 있다.
넷째, 대부분 중출맥(中出脈)의 용진처에 남향을 하고 있다.
다섯째, 22기 국왕태봉의 등급을 분류하면, 1등지가 18기, 2등지가 1기, 3등지가 3기로 구분된다.
여섯째, 산중돌혈은 평지돌혈보다 혈장(穴場)은 평균213.9m, 주산(主山)은 평균339.8m, 안산(案山)은 평균155.1m 더 높은 곳에 입지하고 있다.
일곱째, 국왕태봉과 왕릉은 대부분 좌향이 남향이고, 용수배합을 잘 이루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점은 왕릉은 강(岡)과 잉(孕)이 있는 유혈(乳穴)의 형태로 산기슭에 입지하고 있으나, 국왕태봉은 강(岡)과 잉(孕)이 없는 돌혈(突穴)의 형태로 고산과 들판에 나뉘어 입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본 연구는 국왕태봉 전체가 돌혈(突穴)이라는 공통점과 전기에는 산중돌혈, 후기에는 평지돌혈로 변천하는 것을 규명하였다. 그리고 1등지와 3등지, 국왕태봉과 왕릉의 상호비교를 통하여 각 공통점과 차이점을 도출하는 등 다각도로 국왕태봉의 풍수적 특징을 분석하는 틀을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