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1991년 사이 동유럽 공산국가와 소련의 붕괴는 유럽을 무대로 한 냉전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이로써 사회주의 경제블록이 해체됐는데 이는 잔존 공산국가인 북한에 큰 경제위기를 몰고 왔다. 이러한 때인 1994년 북한 최고 지도자 김일성이 사망하자, 한국과 미국에서는 북한 붕괴론이 생겨났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은 바로 권력을 이어받지 않았는데, 이를 놓고 북한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났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러나 김정일은 끄덕도 하지 않고 2011년인 지금까지 17년간 북한을 이끌고 있었다. 그가 북한 국가주석에 취임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 김일성을 영원한 북한의 국가주석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외부 분석가들은 김일성 사망 얼마 후까지도 이를 몰랐기에 김정일이 국가주석에 취임하지 못하는 것은 권력투쟁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며 북한 붕괴론을 내놓았던 것이다. 북한 붕괴는 대단한 사건인지라 북한을 동독처럼 민주화시켰다가 한국에 통합시키자는 북한 연착륙(soft landing)론과 북한은 루마니아처럼 민주혁명으로 체제와 정권이 동시에 무너지는 경착륙(hard landing)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이러한 북한 붕괴론은 완전히 틀렸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북한의 후원국을 소련으로만 본 오류다. 북한은 6·25전쟁에 직접 참전한 중국과 더 가깝게 지냈다. 중국은 상호방위 내용을 담고 있는 북한-중국 간 조약을 유지했다. 중국은 1972년 미국과 가깝게 지내는 데탕트 물결에 동승했다. 미국과도 가까운 중국이 북한을 받쳐주고 있으니 소련붕괴로 인한 민주화열풍은 북한에 상륙하기 어려웠다. 다음으로는 인민무력부(조선인민군),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호위사령부 등 북한 권력기관의 절대적인 충성을 꼽을 수 있다. 북한 주민들에 대한 지독한 감시체제도 민주화운동을 막는데 기여했다.
북한 붕괴론이 횡행하던 시기 한미연합군은 북한 붕괴에 대비한 작전을 검토했는데, 북한은 1차 북핵위기를 일으켜 한국을 인질로 잡음으로써 군사대결에서는 오히려 우세를 차지했다. 덕분에 북한은 체제와 정권 유지를 보장받고 경제지원까지 받아냈다. 북한 붕괴론은 북한의 승리로 막을 내린 것이다. 2008년 한국에서 보수적인 성향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을 차단했다.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것이 확인되고, 2011년부터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나자 북한에서도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본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는 로버트 저비스가 말한 연상 세트(evoked set)가 작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데 김정일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재스민 혁명이 일어난 것을 1994년 전후의 북한 사정과 비슷하다고 보고 제2의 북한 붕괴론인 북한 급변사태론을 횡행시킨 것이다.
그러나 2011년 전후 더욱 강력해진 중국은 여전히 북한의 생존을 지지해주고 있다. 북한 권부를 떠받치는 세력은 김씨 일가에 충성을 다 하고 있다. 재스민 혁명의 열기가 중국에 상륙해 중국이 민주화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데 북한이 재스민 혁명의 열기로 녹아내릴 가능성은 없다. 국제정치에서는 국익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많기에 객관적인 자료를 내밀어도 수긍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면 계속 아전인수식으로 상황 판단을 하는 몰이해(misperception)를 하게 된다. 북한 급변사태론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이는 전형적인 wishful thinking이다.
이러한 인식이 좁게는 정보판단의 실패를 초래하고 넓게는 정책의 실패를 초래한다. 북한 붕괴나 급변사태를 유도하고 싶다면 몇 가지 징후만으로 성급히 판단할 것이 아니라 강한 의지를 갖고 계속 북한을 흔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미국에서 소련 붕괴나 소련 급변을 예측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wishful thinking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좋은 사례다. 북한 정보 판단과 대북 정책결정은 wishful thinking과 misperception 등을 제거한 후 보다 객관적으로 이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