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새롭게 나타난 도시문화적 현상과 실천을 서울의 극장가(劇場街)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서울에서 극장가의 등장에는 식민화가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1885년부터 일본인들의 성내(城內) 거주가 허용되고 일본인들의 거주지와 상업 지역이 서울 남부에 조성되면서 일본인들은 南村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운영하는 극장을 세웠다. 이와 동시적으로, 조선조까지 상업적으로 운영된 극장을 가지지 않았던 조선인들도 서울의 北村에 조선인 관람자를 대상으로 한 극장을 세웠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오늘날의 명동, 충무로, 종로에 이르는 이 구역들은 현대 서울에서 가장 활기차고 유서 깊은 중심 시가지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이 논문은 서울 극장가의 역사가 식민화라는 역사적 과정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1900년대부터 서울의 경관에 새롭게 등장한 북촌 극장가와 남촌 극장가를 배경으로 민족적으로 이분화된 극장가의 실천이 어떻게 구축되고 구분되며 교통하기도 하였는가를 기술하고자 한다. 특히 이 논문에서는 극장을 운영한다거나 극장에 출입하는 경제 및 소비 생활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일상적인 활동과 행위가 어떻게 경계지어지거나 교통하기도 하였는가에 관심을 둔다. 경성의 극장가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행위 반경이 구획되고 재편되기도 한 식민지적 사회관계의 실천 현장이자 '조선'과 '일본'이라는 코드가 생성되고 인지되는 식민지적 도시문화의 공간적 재현이었다.
본 논문에서 다루는 劇場이란 공연물을 특화한 극장과 활동사진(영화)을 상설로 상영 한 활동사진관(영화관) 모두를 가리킨다. 그런데 공연물이나 이를 특화한 극장과 달리 신문물의 하나로 유입된 활동사진이나 이를 전문으로 한 영화관의 경우 1930년대에 이르러 종래의 북촌과 남촌, 조선인과 일본인, 서양영화와 일본영화라는 이분화된 양상이 한층 복합적이며 역동적으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이유에서 본 논문의 많은 내용은 극장 중에서도 영화관과 관련된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방법론적으로 이 논문은 역사인류학에 위치지어진다. 역사인류학은 역사 속 현지인들의 생활을 집중적이고 구체적으로 조명하여 그들의 존재와 실천의 논리를 해명하면서 '역사'에 대한 이해를 아래로부터 성찰하고자 하는 인류학의 한 분야로 간단하게 나타낼 수 있다. 특히 한국의 식민지시대에 맞을 내리고 있는 이 논문은 '피식민자'의 입장에서 식민지사회의 제도와 실천을 강제되고 억압된 차원에서 이해하기보다 식민 지배층에 반응하고 때로 대응하며 좌절하기도 하는 로컬 사회(local society)의 활력을 현지인들의 입장에서 되살리고자 한다. 따라서 현지인들의 일상적 인지체계나 저항능력을 넘어서 작동 하는 권력과 지배, 통제와 같은 수위에서 논의를 전개하기보다 일상생활의 반경에서 경험하고 관찰되는 수준에서 구분과 차별, 경합과 교통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극장과 관련된 현상과 실천을 검토하면서 본 논문에서는 정책, 사업, 소비의 영역을 분석대상으로 다룬다. 우선, 식민지 경영이라는 각도에서 식민정부의 규제 정책을 살펴본다. 상업적 극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간의 '興行' 활동은 서울에서조차 막 나타나고 있던 새로운 현상이었으므로 식민정부의 식민통치 사안에 있어 강압적인 행정력과 경찰력이 동원될 필요성이 심각하지 않은 '안전한' 규제 대상이었다. 정부는 애초부터 일관적이고 규격화된 정책 형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민간의 활동에 수시로 대응하는 시사적인 규제 방식을 지속하였다. 하지만 극장과 관련된 사업의 규모가 보다 커지고 관람의 현황이 비중있게 되어갈 뿐 아니라 시국에 반응하면서 식민정부는 법제를 재정비하고 보다 강도 높은 정책을 단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다음으로 경성의 극장 사업가들과 이들의 극장 경영에 관해 살펴본다. 사업가들은 한 편으로 경쟁을, 다른 한편으로 결사(結社)를 통해 사업 활동을 영위해 나갔다. 남북촌의 각 영화관은 일본영화 제작사나 서양영화 제작사와 특약관계를 맺었는데, 특약관계의 형성은 영화관 경영 경쟁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경쟁이 일상다반사가 된 극장 사업가들도 사업적 실리를 공유하며 집단적 결사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식민당국의 검열수수료 정책에 대한 사업가들의 결사적 대응은 식민지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사업가들의 이해관계를 가장 적실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될 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적 입장이 사업가들의 실리와 상치(相馳)되는 지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 된다.
관람자의 소비에서는 당시 서울에서 누가 관람자 층을 형성하였고, 관람자의 층위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으며, 이들이 극장을 출입하거나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는 어떠한 것 이었는가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가 중요하다. 1920년대에는 종래 극장 출입에 보다 익숙했던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도 폭넓게 관람자 층을 구성해 가는 시점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개봉관을 중심으로 '중산급' 수준의 관람자가 많아지는 현상도 찾아볼 수 있다. 나아가, 학생과 같은 소인도 극장 관람자의 주요한 층을 이루었는데, 학교나 가정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찻집을 순회하는 일은 유년 시절의 중요한 소비 경험의 하나였다.
1930년대 초반에 경성 극장가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중 하나가 조선인 관람자들의 일본영화에 대한 소비주의이다. 이 무렵 서울 북촌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한 조선인은 와카쿠사영화극장(若草映畵劇場)과 같은 남촌의 영화관에 가서 일본어로 일본영화를 보는 것을 낯설지 않게 여겼다. 조선인 관람자 사이에 새롭게 형성된 일본영화에 대한 소비주의는 종래의 북촌과 남촌, 서양영화와 일본영화, 조선인과 일본인이라는 극장가의 경계를 재편하는 동력의 하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성장과 함께 식민지적 도시문화가 변화하는 조짐이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