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조운동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주로 경제구조, 국가지배체제, 정치, 계급구조, 그리고 노조조직 구조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다수의 논의가 구조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회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조와 함께 행위자가 검토되어야 하는데 한국 노조운동 논의에서는 행위주체에 대한 부분이 상대적으로 비어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구조 보다는 행위자, 이해의 정치(politics of interest)보다는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dentity)를 통하여 노조운동의 위기구조를 진단하려고 한다. 행위주체의 정체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행위자는 구조의 영향 하에 있기는 하지만 구조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판 박아지는 단순한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조와 행위자의 상호작용을 균형있게 이해하는 접근이 노조운동을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이고 한국의 노조운동이 놓인 위기적 상황에 대한 대책 마련에도 유용한 시사점을 줄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적인 정체성을 '저항 정체성'(resistance identity)으로 이해하면서 저항 정체성의 변동을 추적한다. 정체성의 변동과 노조운동 위기의 연결 메카니즘을 밝히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논문의 연구대상 기간인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2005년 사이에 한국 노조운동을 둘러싼 환경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세계사적으로는 동서냉전체제의 해체와 세계 지배질서의 재편, 신자유주의 경제의 지구화가 진행되었으며, 국내적으로는 정치·사회의 민주화, 발전국가 모델의 해체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로의 편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노조운동에서는 제한된 범위이지만 노조운동이 시민권을 확보하면서 조직화와 제도화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이게 된다. 그렇지만 노동시장의 변화로 노동자 집단의 분절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변화는 노조운동 정체성이 변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그런데 상황변화에 대한 주체의 인식에 따라서 정체성이 변화하기도 하지만 기존의 정체성이 변하지 않고 있는 현상이 동시에 목격된다. 상황변화에 대한 주체의 의미지각(perceptions of self-relevant meanings)에서의 차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의미지각-정체성 표준-행위전략의 연결구조가 그것이다.
다양한 정체성의 존재는 정체성들 간의 소통을 필요로 하기도 하지만 정체성들 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소통을 통한 정체성 재정립의 길과 대립과 갈등의 길이 동시에 열리게 된다. 열려있는 두 가지의 길에서 노조운동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상황변화, 정체성들의 자기 범주화(self-categorization), 정파 정치(politics of party)의 동학을 통하여 정체성 변동이 노조운동의 위기구조와 연결되는 메카니즘을 규명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
본 연구는 질적면접(qualitative interview) 조사 방법을 사용한다. 조사는 노조운동 간부와 활동가 24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사 대상자 선정은 대상자의 속성을 고려한 할당틀(frame of quota)을 활용한 유의 표집이 사용되었다. 연구의 타당성을 높이기 위해서 전형적인 사례(critical case)와 함께 일탈적인 사례(deviant case)를 수집하였으며 직설적인(literal sense) 자료 추출과 함께 해석적(interpretive sense) 자료추출 방법을 사용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① 상황 변화에 대한 의미지각 차이로 정체성에 변화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경우도 나타난다. ② 다양한 정체성(multiple identities)들이 소통과 조절을 통한 정체성 재정립에 실패하는 이유는 정체성들의 자기 범주화(self-categorization)와 정파의 정치(politics of party)에서 찾을 수 있다. ③ 정체성 재정립의 실패는 저항 정체성의 화석화(fossilization), 그리고 '몸 따로 머리 따로'라는 정체성의 형해화를 초래한다. ④ 정체성 형해화는 노조조직의 형해화로 연결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체성의 정치로 노조운동의 위기를 진단하고 있는 본 연구는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노조원 대중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추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두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