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지역질서의 구조 변동의 측면에서 냉전을 자리매김하는 것이었다. 20세기 백년, 혹은 '근대'에 대한 지나친 편중을 거두고 장기 지속하는 지역 질서의 연속과 변화의 관점으로 20세기 동아시아 냉전사를 파악해보고자 한 것이다. 그 개념적 방편으로 제출한 것이 '중화 사회주의'이며, 그 개념의 구호 혹은 기호로써 주목한 것이 '동방'이었다. 동시대의 서구와 동구는 물론이요, 앞 시기의 동양이나 (대)동아와도 구별되는 특유의 기제에 천착해본 것이다. 동방에는 '식민지'는 물론이요, '동맹국'이라는 이름의 속국(client state)이나 동구형 위성국(satellite state)이 존재하지 않았다. 중화세계를 구성했던 왕년의 조공국이 독립국으로 전환해가는 '근대적 이행'의 과제를 마침내 완수한 집합적 역사운동이 '동방'으로 표출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중화 사회주의' 내부의 역학 관계를 '중화세계의 근대화' 혹은 '근대화된 중화질서'라고 설명해 보았다. 규모의 비대칭성으로 말미암은 위계는 지속되면서도, 중화세계의 고유한 특징, 즉 소국의 자주성과 독립성의 보장은 한층 강화되어간 과정을 주목하였다. 중화세계의 중층성과 복합성을 수직적인 위계관계로 재편하고자 했던 제국주의적 근대화로부터 반제국주의적 근대화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중화세계의 역사상 처음으로 중원의 국가와 주변의 국가가 주권국가 대 주권국가로 만나면서 도출된 '평화공존 5원칙' 또한 근대화된 중화질서의 제도화 및 정책화로 파악했다. 지난 100년을 통해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반패권주의의 가치와 운동을 집합적으로 공유하면서 역설적으로 '중화 사회주의권, 내부에서 오래토록 지속했던 상·하 관계 또한 대·소 관계로 구조 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관계 전환의 양상이 국가간 수준의 상층부뿐만이 아니라 민간단위에서도 동시에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고문학작품이 활발하게 생산되어 널리 읽혔으며,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 운동을 필두로 한 번역 사업 역시 전개되어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차원에서도 상호간의 텍스트를 독서하고 공유할 수 있었다. 여기에 그들만의 독자적인 스포츠대회까지 개최했던 저간의 사정까지 보탠다면, 지식인들이 '인문외교'를 통하여 공유하던 '문예공화국'으로서의 중화세계가 기층으로 하방하고 심화되어 '인민외교'로까지 확산되었다고 하겠다. 중원에서 주변으로 문화가 일방향으로 전파되었던 과거에 견주자면, 상호 번역을 통한 쌍방향 소통의 새 영토를 개척해갔던 것이다.
냉전기 '동방'은 비단 동아시아에 한정되지도 않았다. 미·소 중심의 냉전구도를 상대화하며 출범한 반등회의 이후 가네포운동과 AA작가회의 운동의 전개와 그 분화와 분열 과정을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중화 사회주의' 진영과 동·서구와의 차이성 못지않은 제3세계 내부의 변별성도 확인해볼 수 있었다. 비동맹운동과의 결별로 '동풍'으로 상징되는 아시아 사회주의 진영이 반패권 운동의 전위에 서면서 '동방'의 지평은 더욱 넓어지기까지 했다. 20세기 초의 동/서 이원론의 구도를 뛰어넘어 삼대륙 (AALA)을 아우르는 천하삼분의 '동방'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이처럼 냉전기에 구축된 신중국과 삼대륙과의 관계는 긍·부정을 아울러 오늘날 중동, 아프리카, 남미와 중국을 잇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의 토대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냉전기에 전개된 독자적인 문학운동과 스포츠운동은 '국가간 체제'를 학습하고 적응하는 집합적인 훈련장이자, '세계문학'과 '올림픽'에 각인되어 있던 제국주의나 냉전구도와 같은 지배 체제를 해체하고 재구축해가는 역사적 실험장이기도 했다. 이로써 문명권 내부 구성원 간은 물론이요, 문명 간 교류와 소통의 창구를 복원함으로써 19세기 이래로 관철되어온 분리지배(divide and rule)에 저항해가며 탈냉전을 예비적으로 연습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동방과 접속하여 전개된 '삼개세계'라는 발상은 지리적 명칭으로서의 '제3세계'에 그치지 않고 동/서구와는 지평을 달리하는 '제3의 세계'를 기획하는 역사적 실험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 기획의 기저에는 각 지역마다 자리한 '장소의 혼'이 내장되어 있었고, 그 독자적인 지역 질서의 유산을 더 높은 수준으로 복원하는 집합적 운동이 동아시아에서는 '동방'으로 표출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중화세계의 근대화'라는 장기 지속적 지평 속에서 '동방'을 위치 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