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朱子家禮』와 古禮의 '喪禮 初終'을 중심으로 문헌 고찰을 통해, '先秦時代의 正寢'이 본래 가졌던 기능과 의미를 살펴보고, 先秦時代 이후 시대에 따라 正寢이 어떻게 인식되고 변화되었는지 분석하였다. 그리고 『朱子家禮』가 조선에 도입·보급되면서 당시 양반들은 중국의 正寢을 어떻게 이해하고 士大夫家[班家]에 적용하였으며, 古禮를 깊이 연구하게 되면서 正寢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분석해 보았다.
먼저 중국의 정침 인식 대하여 분석한 결과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先秦時代의 正寢과 燕寢은 그 의미와 기능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본래 '室의 개념'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신분에 따라서 부르는 명칭이 달랐다. 天子·諸侯의 경우 정침은 '노침[익실]', 연침은 '소침'이었다. 卿·大夫·士의 경우 정침은 '적실[적침]', 연침은 '하실'이었다. 안팎주인 모두 正寢[正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先秦時代의 정침은 연침에 상대되는 말로서 평소 편안하게 거처하는 곳이 아니라 병이 있을 때 거처하는 곳이며, '朝事를 듣는 곳', 즉 일을 다스리는 곳이라고 하였다. 그 배치는 정침[적실, 노침]이 연침[하실, 소침] 앞에 있었다. 또한 정침이 유교의례에서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는 尊貴한 곳, 바른 곳[正處]으로서 喪禮, 祭禮 등에서 재계하기 위해 이곳에 거처한다. 특히 喪禮에서는 병이 난 초기부터 정침으로 옮겨 거처하며 齋戒하고 반드시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바른 일[正]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喪禮의 첫 번째 의식 절차로서 '初終'의 禮가 정침에서 행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先秦時代 이후 정침에 대한 다양한 說들이 있었다.
첫 번째, 後漢代와 唐代에는 '聽事[廳事]'가 정침이 되었다. 卿·大夫·士의 경우, 先秦時代의 정침과 연침인 '적실과 하실'은 '室의 개념'이었는데 後漢代에는 '聽事[정침]와 內堂[연침]'으로서 '堂의 개념'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南宋代 『朱子家禮』에서 정침은 '前堂'이라고 하였는데 前堂에 대한 주장이 학자들마다 달랐다. 『朱子家禮』 註釋書들을 통해 볼 때, 外寢, 正廳, 內堂이라는 說들이 있었다. 특히 '內堂說'은 '예전의 연침[하실, 내당]'이 정침이 됨으로써 '先秦時代 正寢'이 가졌던 본래의 유교적 상징성은 사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세 번째, 漢代부터 '三代時代 宮室'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고, 특히 宋代와 淸代에 많은 연구 성과가 있었다. 이 시기에는 유교의례가 행해지는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되는 정침을 '營建할 수 있는 하나의 건물[堂]'로 보았다. 그리고 行禮가 이루어지는 '正寢'과 '廟'는 그 공간구성이 같다고 보았는데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시대에 따라 학자들마다 다양한 주장이 있었다.
다음으로 조선의 정침 인식에 대하여 분석한 결과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조선에서는 우리 家屋[班家]에 중국의 正寢과 같은 공간은 없다고 인식되었다. 이것은 正寢이 유교의례를 행하는 별도의 공간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둘째, 『朱子家禮』의 영향으로 당시 조선에서는 정침이 '堂'으로 인식되었으며 우리 家屋에서 '대청'을 정침으로 삼고 있었다. 史料를 근거로 하여 볼 때, '사랑대청[外堂]'을 정침으로 간주하는 경우와 '안대청[內堂]'을 정침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16세기 이후에는 점차적으로 '안대청'을 정침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大廳'을 정침으로 삼으면서 가옥 내에 대청의 중요성과 그 규모가 점차 커진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당시 조선에서는 『朱子家禮』 「喪禮」의 첫 의식 절차인 '疾病, 遷居正寢.'에서의 정침을 '안대청'으로 삼고 있었다. 임종 직전에 안대청으로 옮겨 그곳에서 禮를 행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바른 죽음, 즉 正終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先秦時代와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단지 정침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이후 禮를 행하는 것에만 의미를 둔 것으로 보인다. 史料를 근거로 하여 볼 때, 時俗에서 廢床寢地와 齋戒의 절차는 생략되었고, '遷居禮'가 점차 사라졌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넷째, 조선 후기에는 古禮를 근거로 하여, 『朱子家禮』만을 보고 時俗에서 '안대청'을 정침으로 삼고 있는 것과 병이 위중한데 옮기는 것에 대하여 비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과는 달리 정침을 '室[방]'로 인식하게 되었다. 정침을 '齊室[正終之室]'로서 禮를 행하는 별도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경우와 '家長이 평소 거처하는 곳[外寢, 즉 사랑방]'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茶山은 古禮와 時俗을 모두 반영하여 정침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남녀를 구분하여 각각 평소 거처하는 곳인 사랑방[外寢]과 안방[內寢]에서 병이 있을 때부터 禮가 행해짐을 밝히고 있다.
다섯째, 앞서 밝힌 先秦時代의 正寢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하였다. 經傳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사(士)의 '적실[적침]'은 '남자[夫]가 평소 거처하는 곳'인 '外寢[정침]'으로 판단된다. 이를 조선에 적용해보면, 士大夫家[班家]의 공간구성에서 정침은 '사랑방[外寢]'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先秦時代의 정침은 尊貴한 곳[尊者의 공간], 齋戒하는 곳, 바르게 죽는 곳으로서 喪禮 의식이 시작되는 장소이다. 卿·大夫·士의 경우 '적실[적침]'에서 喪禮 '始卒[始死]' 의식이 행해졌다. 先秦時代에는 중요한 일은 모두 '廟'에서 이루어졌는데 後漢代부터 '家廟의 제도'가 점차 '祠堂의 제도'로 변화되면서 行禮의 장소가 협소해졌다. 그러므로 後漢代와 唐代에는 '聽事[廳事]'가 정침으로서 의례를 행하는 중심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南宋代 『朱子家禮』를 살펴보면, 모든 유교의례가 '前堂[정침]'을 중심으로 행해짐을 알 수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朱子家禮』의 영향으로 行禮가 이루어지는 '堂[대청]'을 정침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며 후기에는 古禮의 영향으로 '室[방]'을 정침으로 보는 견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先秦時代 이후 정침에 대한 인식이 '室' 중심에서 '堂' 중심으로, '齋戒·正終[齊終]' 중심에서 '行禮' 중심으로 변화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의식 절차에 담긴 유교적인 의미보다 직접 禮를 행하는 형식에 더 치중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 연구를 통해 先秦時代 정침의 기능과 의미 및 장소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풍속에 따라 계속 변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經傳과 그 註釋書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正寢에 대한 다양한 주장과 번역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正寢에 관한 연구는 중국과 조선의 유교문화와 조선의 士大夫家[班家]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연구로 생각되는데 향후 사례조사와 함께 좀 더 폭넓은 문헌조사를 토대로 계속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