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방직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자본으로 설립된 한반도 최초의 방직공장이다. 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방직공장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체로 자리 잡았다. 조선방직은 해방 직후 제정된 귀속재산처리법에 의하여 민간에 불하될 예정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조선방직의 불하가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1951년 3월 공매가 다시 진행됐다. 예정된 불하 대상자는 당시 조선방직의 사장인 정호종과 야당 국회의원 김지태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조선방직의 수익금이 야당의 정치자금으로 사용될까 염려하여 불하 문제에 직접적으로 간섭했다. 조선방직의 민간 불하는 이유 없이 연기 되었고 결국 국영기업체로 선정됐다. 이 과정은 대통령 이승만이 조선방직에 대한 이권을 반대 정치세력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한 계획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 이승만은 1951년 4월 조선방직의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정호종, 김지태 등의 경영진들을 구속시키고 9월에는 강일매를 새로운 사장으로 임명했다. 강일매가 사장으로 임명되기 전 대한노총의 위원장이었던 전진한은 상공부 장관을 직접 찾아가 강일매의 사장 임명은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을 전했다. 상공부 장관은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없도록 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전진한을 설득했다. 하지만 강일매는 사장으로 취임한 후 노동자들에게 폭언과 부당한 대우를 지속했다. 이에 전진한은 강일매 사장을 찾아가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타협점을 찾고자 노력하였으나 강일매 사장은 오히려 자신을 찾아온 전진한을 위협했다. 또 전진한은 상공부 장관을 통해 대통령 이승만과의 접견을 계속해서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이러한 전진한의 타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 좌절되었고, 결국 전진한과 조선방직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조선방직 쟁의 사건으로 인하여 전진한은 대한노총 위원장 직위를 박탈당했고 대통령 이승만과의 정치적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전진한은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제2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었다. 전진한은 대한노총 위원장 활동과 조선방직 쟁의 사건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법률적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경험들을 노동법을 제정하는 과정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진한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노동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물론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53년 노동법이 제정될 당시 한반도는 한국전쟁 직후 정치적·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이후에는 대통령 이승만의 독재와 군부의 독재정치가 이어지면서 노동법은 제대로 실현되기 어려웠다. 정치적인 민주화가 진행되는 1980년대 이후 노동법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었다. 이렇게 시행되기도 어려웠던 노동법 제정은 제정했다는 사실 자체와 1950년대 노동계의 현실을 반영했다는 것에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선행연구들을 살펴본 결과 전진한이 조방 쟁의 사건의 타협적 해결을 위해 노력한 부분, 전진한과 이승만의 조방 쟁의를 둘러싼 갈등 전개 과정과 결과, 조방 쟁의 사건과 노동법 제정이라는 두 사건을 연결하는 전진한의 역할과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한 부분의 연구는 미진한 점이 있었다. 이러한 내용들의 보강을 통해 조방 쟁의와 노동법 제정에서의 전진한의 핵심적 역할, 전진한의 이승만과의 갈등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기존 연구에서 사용한 자료와 사건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관련 인물들의 담화내용이나 발표들이 포함된 신문자료를 활용했다. 그리고 전진한의 입법 활동과 사상적 배경을 파악할 수 있는 국회정기회의속기록, 자서전 등을 활용했다.
전진한은 해방 이전 협동조합운동과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해방 직후에는 조방 쟁의와 노동법 제정의 두 중요 사건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노동법 제정 이후에도 국회의원으로 계속해서 의정 활동을 했다. 이 논문에서는 전진한의 조방 쟁의 사건과의 구체적 관련성, 대통령 이승만과의 정치적 결별, 노동법 제정상의 역할 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