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은 국내적·국제적으로 자유와 민주의 가치와 정신을 보여준 민주 혁명의 본보기였다. 4·19 혁명의 이념과 정신은 지금까지도 살아 숨 쉬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이정표로 자리하고 있다. 허정 과도정부는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먼저 허정 과도정부는 4·19 혁명에 의한 이승만의 하야로 탄생한 일종의 혁명적 정부였다. 최초로 시민들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타도한 민주주의의 불꽃의 결과였다. 다음으로는 한국 최초의 과도정부였다. 과도정부라는 특수한 정부구성 때문에 정치학 분야에서는 다양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선행연구를 검토한 결과 과도정부에 대한 정의와 특징, 최규하 정부와 허정 과도정부의 형태 비교, 과도정부의 공과를 평가하는 논문이 대표적이다.
과도정부를 이끌었던 허정 개인에 관한 연구는 한국 현대사에서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허정이 남긴 자서전을 제외하면 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적고, 대부분 과도정부 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허정은 이승만의 측근으로서 그와 함께 활동했다는 점과,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인해 정치적 위기에 몰렸을 때,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4·19 혁명의 결과는 내각책임제(의원내각제) 개헌과 제2 공화국, 장면정부의 수립이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내각책임제를 기초로 하는 개헌이 이루어 진 것이다. 장면은 1960년 제5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고, 국회에서 제2 공화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4·19 혁명을 이끈 학생과 시민들은 장면정부에 대해서 큰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장면정부는 허정 과도정부에게 이양된 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과도정부' 라는 특성 상 허정 과도정부는 정권이양, 헌법 개정 등 다음 차기 권력을 위한 준비를 하는 임무가 부여된다. 이 글에서는 허정 과도정부 역할에 대한 판단의 기준으로, 먼저 4·19 혁명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했는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이유는 허정 과도정부 자체가 4·19 혁명의 발생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허정 과도정부가 발표한 시행방책을 제대로 이행했는가에 보다 중점을 두었다.
허정 과도정부와 장면정부의 역사적 의의는 두 가지 측면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으로 보았을 때는 분명 민주주의의 발전이었다. 그 이유는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주의 정신을 지키고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3·15 부정선거로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사태에 당면하여 시민들은 시위를 전개했다. 시민들은 혁명을 통해서 한국사상 최초의 과도정부를 세웠으며, 최초로 내각제와 양원제를 위주로 한 새 헌법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총선이 진행되었다.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정권을 세웠다는 시민들의 성공기억은 4·19 혁명이 과거의 종결이 아니라 현재의 진행이라는 의미로 각인되었다. 이는 오늘날 정치적인 불의에 항거하여 일어나는 성숙한 민주주의 시민의식의 본보기로서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4·19 혁명세력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점도 동시에 짚어져야 한다. 혼란했던 정국에서 민주주의 체제 전반을 뒤흔드는 국가적 위기를 초래할 만한 큰 문제였던 군부에 대한 통제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은 결정적 한계라 할 것이다. 이는 결국 4·19 혁명을 좌절시키는 군사 정변으로 이어졌다는 면에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역사적 부채를 남기게 된 것이다.
본 논문은 4·19 혁명의 연장선상에 놓였던 허정 과도정부와 장면정부의 연계성, 특히 그 정치적 맥락에 초점이 두어졌다. 이런 까닭에 허정 과도정부와 장면정부의 경제적인 정책과 사회·문화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앞으로 4·19 혁명과 허정 과도정부, 장면 정부에 대한 정치적 면을 포함하여 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 측면도 포괄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면 보다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