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실천해야 할 신앙의 내용을 현실의 삶에서 적용하고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생겨나는 괴리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괴리감으로 인한 신앙과 삶의 간격을 줄이고자 노력하지 않으려는 신앙인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이 자칫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려 신앙에 대한 의무와 죄의식만을 남기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이자 선물인 계명과 성사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불러일으키기보다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짓게 하거나 죄의식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자유롭지 않고 기쁘지도 않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라는 문헌을 통해 "영적 세속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위험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영적 세속성의 주된 원인으로 두 이단 사상을 지목하였다. 하나는 "순전히 주관적인 믿음인 영지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신(新)펠라기우스주의"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두 사상의 교묘한 유혹에 빠진 줄도 모른 채 자아도취와 자기만족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겪는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삶의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는가?' '신(新)펠라기우스주의의 유혹에 빠져 복음적 기쁨이 사라진 그리스도인에게 올바른 신앙생활을 제안할 수는 없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신앙의 실천과 삶의 적용의 괴리감에서 시작하여, 하느님의 은총보다는 율법만을 강조하는 경향에 대해 논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과 문자(De Spiritu et Littera)」를 연구하여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작품 안에서 영혼 구원을 위해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하느님의 은총보다 앞선다고 생각했던 펠라기우스를 반박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활동 안에서 율법과 은총의 상호관계를 증명하였다. 아울러 그는 인간을 위해 주어진 율법은 인간을 죽이는 문자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을 살리는 은총의 도구가 되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점을 바탕으로 논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영과 문자」에서 강조하는 바오로 사도의 "죄가 많아진 그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는 말씀의 의미를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은총 개념' 안에서 분석하였다. 즉, 은총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지만 죄는 하느님을 배척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죄와 은총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 논문을 통해서 성령의 은총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하느님의 자비로움이 없으면 죄가 많다 하더라도 은총은 절대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해서 우리는 정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이 "죄가 많아진 그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죄인의 공로로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사슬에 얽매여 있음에도 은총을 받을 수 있고 그 은총을 청할 수 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의 「영과 문자」를 통해 찾게 된 '신앙과 삶의 괴리' 그로 인한 '율법의 종살이'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순수한 자유의지'이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그분을 믿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얻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은총으로 죄에 병든 영혼을 치유하고, 억압과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우리의 순수한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정의를 사랑할 때, 우리는 '율법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믿음의 율법'을 행함으로써 정의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총을 배제한 채 인간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잘못된 것임이 밝혀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과 문자」에서 오늘날 신(新)펠라기우스주의에 빠져 율법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성령의 영감을 거슬러 박물관의 전시물이나 선택된 소수의 전유물'처럼 신앙생활을 이어오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믿음의 율법'을 통해 정의로워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만을 주장하던 길에서 '사랑의 길로 이끄시는 성령'께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게 함으로써 잃어버렸던 '복음의 매력과 풍미'를 되찾고, 수많은 계명과 규칙들 사이에서 '하느님 얼굴과 형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신앙과 삶의 일치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 안에서 날마다 자유로이 온전한 율법을 지키며 하느님의 얼굴을 이웃에게 드러내는 '성덕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