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고대의 「聖德太子」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이면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인물의 존재는 매우 드문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일본국민이 품고 있는 「성덕태자」라는 偶像은 실은 明治維新 이후의 근대사 속에서 형성되어져 온 것이다.
전근대 특히 江戶時代에서는 유학자나 國學者에 의해 「성덕태자」는 통렬히 비판되었고, 공격되었다. 그것은 불교에 대한 비판과 일체화된 형태로 행해졌고, 또한 崇峻天皇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공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帝國憲法이 표방한 근대국가의 구축과 함께 국가와 국민의 숭배대상으로서, 위대한 정치지도자·사상가로서 17條憲法의 제정자인 「성덕태자」는 현창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하나의 大逆轉 현상이다. 그 정점은 1921年(大正 10)의 「성덕태자」 1300忌年 사업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근대일본의 식민지정책이나 國體 재건의 이념 등이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지폐에 「성덕태자」가 등장하는 것도 이 이후이다.
1945年(昭和 20) 일본의 패전에 의해 새로운 日本國憲法과 함께 戰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덕태자」는 「和」를 주창하는 평화주의자로서 의상을 바꿔 입으면서 戰後로 계승되어져 갔다. 여기에 일견 戰前과의 차이를 엿볼 수 있는 듯 하나 그 본질적인 점은 전전으로부터의 계승에 있다.
앞으로 「성덕태자」가 어떻게 취급되어 가는가 하는 점은 깊이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