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의 구조면에서 고구려 평양성은 산성을 끼고 형성된 平山城으로 複郭式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평지 宮城과 입보용 山城을 결합한 전기 평양성의 형태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고려의 도성인 開京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양도성에서는 이보다 한층 발전하여 도성의 성벽이 궁성과 시가지 전체를 두르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 때문에 한양도성은 肅宗 때 入保用 山城인 北漢山城을 쌓아야만 하였다.
도성의 축조과정 면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은 궁궐, 궁성(내성), 시가지를 두른 외성 순으로 축조되었으며, 한양도성은 궁궐, 성곽, 궁성 순으로 축조하여 궁성보다 시급한 성곽을 먼저 축조하였다. 이처럼 新都의 건설에서는 왕의 居所인 王宮이 먼저 축조되게 마련이었다. 신도의 위치가 정해지면 한양도성처럼 먼저 宮闕, 宗廟, 社稷壇이 조성될 장소를 정하게 되고, 이어 도성민을 보호할 성곽의 基地를 정하게 된다.
작업 규모면에서 고구려 평양성의 각자성석에 새겨진 축성집단의 수작거리는 里를 단위로 하는 대규모라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步를 단위로 하는 소규모인 신라의 축성비와는 차이를 보인다. 여기에서도 고구려다운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役夫들의 성격문제에서 고구려 평양성의 축조에는 동원된 役夫들에 대한 자료는 없다. 한양도성에서는 농민부역군인 民丁(烟軍)이 調發되었다. 민정이 조발된 만큼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는 농한기를 철저히 이용하였다. 고구려 평양성의 外城에서는 농번기에 축조를 시작한 것은 당시 隋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추진되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평양성의 역부도 한양도성의 예처럼 민정이 전국적으로 징발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또 한양도성에서는 역부의 役糧은 自擔을 원칙으로 하였다. 자담일 경우 먼 곳에서 役所까지 식량을 운반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역소에서 보관하는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화재로 인해 역량이 불타자 나라에서 역량을 대신 지급하여 준 일도 있었다. 또 운반이 쉬운 布를 役所로 가지고 와서 곡물로 바꾸었기 때문에 한양에는 곡물의 품귀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고구려 평양성에서도 민정이 징발되었다면 역량은 자담을 원칙으로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평양성과 한양도성의 축조과정을 통해 新都의 건설과 遷都는 많은 어려움과 희생이 수반되는 힘든 役事라는 점을 알 수가 있었다. 한양도성은 신왕조가 세워지고 신도가 건설된 만큼 4년이란 비교적 단기간에 완성되었으나, 고구려 평양성은 무려 42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대내외의 정세변화에 따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점차적으로 축조되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만일 고구려가 평양성과 같은 천연의 요새를 축조하여 천도하지 않았다면 고구려는 隋·唐의 대군을 상대하여 그렇게 오래 버티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 평양성의 축조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