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지 작품의 주요 모티브인 모국체험 서사는 다층적 해석과 복합적 의미망의 산출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한 개인이 국가라는 근대적 공간과 맞닥뜨리며 겪게 되는 언어, 문화, 심리, 신체적 충격과 갈등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포착하고 있는 이양지의 작품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조국지향의식이 어떻게 한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과 내면세계, 신체 감각과 마찰을 일으키고 굴절되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본고에서는 이양지의 작품 「각(刻)」(1984)을 중심으로 시간과 공간으로 표상되는 근대적 규율 기제가 어떻게 자아의 내면과 신체를 조정하고 억압하면서 분열시켜 나가는지, 또한 재일조선인의 모국체험 서사가 근대화된 오국의 풍경과 어떻게 충돌하면서 해체되고 변모하는지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모국체험의 중심 공간이 되는 하숙집, 학교, 서울의 거리는 모두 '나'의 존재를 압박하면서 규율화된 국가 제도와 민족적 이데올로기를 강압적으로 주입하는 거대한 공공장소이며, 분절화된 시계적 시간과 강박적 시간관념은 개인의 삶을 획일적으로 통제하고 균질화함으로써 각 개인의 고유한 내면세계를 억압하고 사물화하는 근대적 장치이다. 그러나 자기 내면의 실존적 목소리를 외면하고 모국에서의 근대적 시·공간 경험을 타율적으로 학습하던 '나'는 결국 분열된 내면의 분출을 통해 규율화된 일상을 해체하고 내면에 잠재한 탈주 욕망을 성취함으로써 왜곡된 모국체험의 허구성을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조국지향의 내면화 과정의 '실패'는 역설적으로 획일적 국가 이념에 의해 통제되고 규율화된 조국, 상상의 민족 공동체로부터의 '탈주'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양지 문학의 경계성, 탈구축성을 생성하는 하나의 분기점으로 파악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