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주한일본군 헌병대, 수비대, 한국경찰이라고 하는 일제의 한국 '치안유지' 기구가 남긴 정미의병 '토벌' 기록들의 종류와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 그중 헌병대 관련 기록에서 보이는 문제점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이다.
일본군 수비대의 '토벌' 기록은 그들이 전투부대인 관계로 '토벌' 당시의 전투 과정이 생생히 묘사된 1차자료가 다수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었고, 한국경찰이 남긴 '토벌' 기록은 행정기관의 특성상 다양한 형태의 자료가 존재했으며, 군 관련 기록에 비해 현재까지 국내에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헌병대가 남긴 기록은 수비대와 경찰이 남긴 다양한 기록들에 비해 그 수가 적고, 서술에 과장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당시 헌병대가 놓여있던 상황과 관계가 있었다.
1910년 6월의 '헌병경찰제' 실시를 통해 한국의 경찰을 지휘·감독하면서 '치안유지'를 한손에 장악하게 되는 헌병대이지만, 통감부 설치 초기에는 일본군 수비대, 한국경찰에 비해 그 역할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1907년 후반기의 의병투쟁격화를 계기로 헌병대는 급속하게 그 기구를 확장해 나가지만, 그것은 곧 다른 기구가 먼저 가지고 있던 역할을 침식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헌병대는 기구 확장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른바 '헌병 우위론'을 내세워 당면의 최대과제인 의병투쟁을 진압하는데 가장 적합한 기구는 자신들이라는 주장을 펼쳤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수비대와 한국경찰을 견제해가면서까지 '토벌' 실적을 올리기 위해 집착하였다.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한 행태는 '토벌' 현장에서뿐만이 아니라 그 성과를 기록한 문서에도 반영되었다. 헌병대 스스로가 기록하여 상부에 올린 '토벌' 성과 보고서류는 물론이고, 『朝鮮憲兵隊歷史』와 같은 부대사 편찬에도 헌병대의 우위성과 뛰어난 성과를 어필하기 위한 기술이 행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병합 후에 조선군사령부가 편찬된 '토벌' 관련 종합보고서에 해당하는 『朝鮮暴徒討伐誌』에도 영향을 끼쳐, 그 통계표에 헌병대에 유리하도록 성과 수치가 '누락'되는 일까지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널리 공인되어 이용되고 있는 기록물이라 할지라도 기록이 생성될 당시의 사회적 정황 및 작성자의 의도를 철저히 검증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