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화양노졍긔』의 문학적 특성을 살펴 작품 속에서 형상화된 '화양동'이라는 공간의 상징적 의미를 파악해 보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 작품은 1910년대 화양구곡을 유람하고 기록한 기행문으로, 아직까지 학계에 소개되지 않은 자료다. 작자는 1911년 (신해)과, 1904년(갑진) 10월 두 차례 화양동을 기행한 후 이 작품을 기록하였다.
작품의 구성과 문체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전체적으로 '현재(1911년) - 과거(1904 년) - 현재(1911)'의 뚜렷한 3분 구조를 갖추고 있다. 채운암과 환장암에 대한 기행은 과거 회상의 형식으로 중간에 삽입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견문은 주로 구곡과 관련한 사적의 命名에 대한 어휘 풀이나 혹은 그 유래를 고사를 토대로 설명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주로 동행하는 인물들 간 문답의 형태로 전달되고 있다. 대체로 어부는 작자와 비슷한 위치에 있으나, 어부를 제외한 다른 동행인(두 명의 객, 서리)은 대체로 작자나 어부보다 낮은 위치에서 이들이 제공하는 지식을 수용하고 있었다.
『화양로졍긔』의 내용적 특성은 다음과 같다. 이 작품도 역시 명나라에 대한 의리론을 표방하고 있으며, 만동묘를 통해 우리나라가 그 '中華'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또, 유학을 제외한 다른 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부분적으로 민간 설화가 끼어들어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송시열이 화양동에 은거한 이래로 화양동은 중화사상의 근원지로서의 상징적인 장소로 탄생하였다. 즉, 화양동은 송시열이 주자의 행적을 흠모하여 만년에 강학을 했던 공간일 뿐 아니라, 송시열 사후에 그의 제자 권상하의 노력으로 막강한 상징성을 지닌 하나의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화양로졍긔』에 나타난 작자 의식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작품이 창작된 시기가 1910년대임을 감안한다면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다. 화양동 관련 시문에서 효종에 대한 언급이 제한적이라는 점, 망국의 설움이나 비통함이 일체 보이지 않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화양로졍긔』의 작자는 "탈국가적 은둔 유림" 혹은 "방관적" 태도를 견지한 토착 지식인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