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래에 있어서 왜국의 對韓정책 특히 「임나의 조」 정책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는 왜왕권에 파견된 신라사에 의한 「임나의 조」 納入・進調 시기에 주목해, 왜 신라가 해당시기의 왜왕권에 「임나의 조」를 보냈는가, 즉 그 배경・이유의 해명에 중점이 놓여져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종래의 이해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이미 별고를 통해 검토했다.
본고는 임나의 조 문제에 있어 무엇보다도 임나의 조의 사상사적, 이데올로기적 측면만을 중시해 온 종래의 통설적 이해에 대해, 임나의 조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왜국의 대외정책, 특히 對신라외교정책의 산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 임나의 조 정책의 본질은 신라를 통해 왜국 내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적자원(금은동 등 금속광물자원)을 도입 확보하기 위한 적극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정책이라는 전고의 이해를 기초로, 임나의 조 정책의 전개과정을 특히 「신라임나사」의 래왜시기에 주목한 신설의 논자들과는 달리, 왜국이 임나의 조 정책을 직접 수행하기 위해 신라에 파견한 「견신라임나사」 및 그 시기에 주목하여 각 시기에 어떤 목적으로 정책이 추진되었는지, 임나의 조 정책의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았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먼저, 왜국의 임나의 조 정책 추진과정에서의 구체적인 움직임 특히 신라・임나에의 견사 및 対신라 군사행동과 「임나의 조」정책이라는 양자의 관련성인데, 왜왕권의 견사에 의한 「임나의 조」정책 추진과 신라출병을 포함한 왜국의 군사행동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왜왕권이 「임나의 조」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행한 신라・임나에 대한 견사는 그 대부분의 경우 対신라출병이라는 군사적 움직임과도 병행해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신라로부터의 「임나의 조」의 제공・증여는 왜왕권의 견사 혹은 군사적 움직임에 따른 강한 외교군사적 행동이 있었을 때에만 비로서 실현되었다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왜왕권의 견신라임나사 파견 즉 각 시기의 임나의 조 정책추진의 구체적인 배경 및 목적은 공통적으로 각종 궁의 조영, 불교문화 즉 절 및 불상의 조영, 관위제의 시행, 견사(견수사 및 견당사)의 비용 등과 관련하여 발생한 왜국내의 금속광물자원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従来における倭国の對韓政策、特に「任那の調」政策の展開過程についての理解は、倭王権に送られた新羅使による「任那の調」納入・進調の時期に注目し、なぜ新羅が当該時期の倭王権に「任那の調」を送ったのか、その背景・理由の解明に重点が置かれていた。ところが、こうした従来の理解には、既に別稿で検討したように、多くの問題点があった。本稿は、「任那の調」をめぐる問題において、何よりも任那の調の持つ思想史的、イデオロギー的な側面だけを重視・強調してきた従来の通説的理解に対し、任那の調の問題はあくまでも倭国の対外政策、とりわけ対新羅外交政策の産物として理解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点、「任那の調」政策の本質は、新羅との外交を通じて、倭国内で必要とされる各種の物的資源(主に金銀銅などの金属鉱物資源)を新羅から導入・確保するための、積極的で極めて現実的な政策と看做すべきであるという理解に基づき、「任那の調」政策の展開過程を従来の<新羅・任那使>の来倭時期に注目してきた新説論者たちの観点とは違って、倭国が任那の調の政策を直接推進するために派遣した<遣新羅・任那使>及びその使いの派遣時期に注目し、各時期においてどのような現実的な必要性・目的によって政策が行われたのか、すなわち「任那の調」政策の展開過程を具体的に確認してみた。その結論は次の如くである。まず、倭国の任那の調政策の推進過程において現れた具体的な動き、特に対新羅・任那への遣使及び対新羅軍事行動と「任那の調」政策という両者の関連性の問題であるが、倭王権の遣使による「任那の調」政策の推進と新羅出兵を含む倭国の新羅に対する軍事行動は、相互密接不可分の関係にあったのである。換言すれば、倭王権が「任那の調」政策を推進するために行った新羅・任那への遣使は、その殆どの場合において、対新羅出兵という軍事的動きと平行してなされたのである。結局、新羅から倭国への「任那の調」という物的資源の提供・贈与は、倭王権の新羅への遣使あるいは軍事的動きによる強い外交・軍事的働きかけがあった時にはじめて、実現されたと理解せざるをえないのである。つぎに、倭王権の遣新羅・任那使の派遣、すなわち各時期における「任那の調」政策推進の具体的な背景・目的は、共通的に該当時期における各種宮の造営、仏教文化つまり寺及び仏像の造営、冠位制の施行、中国への遣使(遣隋使・遣唐使)の費用、などに関連して発生した、倭国内における金銀銅などの金属鉱物資源の需要に応ずるためのものであったの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