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선은 엄숙한 당위의 명령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이나 본능이 갈구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선의 자발적 실현이 수월해진다. 본고는 그런 각도에서 선의 자발성의 가능한 길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지성과 지능에 바탕한 학습적 길과 선천적 자연적 본성과 본능에 기초한 능력의 두 가지로 나뉜다. 이것을 노자는 무위적 길이라고 불렀다. 더구나 하이데거가 서양 철학에서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강조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철학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것은 서양 철학이 철학사적으로 존재자적인 소유론의 범위를 벗어나서 존재론의 차원으로 진행하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서양 철학사에서 등장한 모든 인식론과 도덕론이 소유론적 차원의 말임을 뜻한다.
그리고 역사의 진보라는 개념도 소유론적 차원의 말임을 뜻한다. 이것을 니이체(F.W. Nietzsche)의 개념에 따라 옮기면 모든 것이 역사에서 권력 의지로 평가된다. 그리고 데카르트(R. Descartes)의 사유도 결국 인식론적 소유의지의 천명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의지는 다른 말로 바꾸면 라캉(J. Lacan)이 말한 남근 중심주의의 재천명과 같다. 남근 중심주의 재천명은 서양에서 기독교적 신학의 부계 중심주의와 동양에서 유교의 부계 중심사상과 함께 맥을 통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세계사에서 존재론적 사유를 처음으로 제창한 이는 노자(老子)이고 부계 중심주의에 항거한 최초의 철학자가 노자다. 노자는 수컷을 멀리하고 암컷을 철학적으로 찬양한 철학자다. 그에게 수컷은 영토적 종자적 소유의식의 화신과 같고, 암컷은 자궁적 공동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공동 존재의식을 상징한다. 이런 공동 존재의식을 노자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고 불렀다. 이 암컷의 존재론의 차원에서 본다면, 니이체가 말한 소유론적 권력 의지도 힘의 의지로 변한다. 암컷의 존재론은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적인 사유의 본질과 서로 만난다.
암컷의 존재론은 수컷의 주장과 같은 도덕적 원리주의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의와 같은 허구적 신화를 찾지도 않는다. 그리고 도덕적 선의 세계도 실천이성의 판단과 의지가 관여하는 곳이 아니고, 자연적 본성이 사랑하는 일일 뿐이다. 선은 자연적 본성의 경향이 지향하는 것으로서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경향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익이다. 이익에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선이다. 그런데 그 이익은 데리다가 갈파한 바와 같이 일종의 이중적인 파르마콘이다. 이익의 약의 측면은 자리이타적(自利利他的)인 경향이고, 이익의 독은 이기배타적(利己排他的)인 성향이다. 이 이중성은 노자가 갈파한 현(玄)의 의미와 만난다. 그러므로 도덕교육은 이익처리의 방편론이 되어야 한다.
자리이타적 이익은 힘의 의지요, 신바람이 나는 에너지의 발양기운이요, 존재론적으로 아낌없이 주는 자연의 보시(布施)와 같다. 그에 반하여 이기배타적 이익은 권력 의지요, 소유론적 지배의지의 다른 이름이다. 선(善)행위는 자기의 기호를 성찰하고 그 기호에 따라 삶을 사는 것이다. 그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도덕교육이다. 그것은 명분론에 얽매인 유교적 당위성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