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지』는 일제 시기에 창작된 이기영의 마지막 장편소설로서, 일제 말기에 작가가 열정적으로 펼쳐 보였던 생산력주의의 완성과 그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기영은 서사의 표면에서는 국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생산소설의 기본 성격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주지만, 심층적인 차원에서는 일제 말기의 국책이 전혀 불가능한 기획임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처녀지』는 분열된 텍스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분열과 균열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남표와 선주의 죽음을 통하여 드러난다.
남표, 신경아, 이선주의 연애는 남녀의 이념과 사랑이 일치하는 이념적 연애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녀지』에서 사회주의적 연애의 구조와 메커니즘은 그대로이지만, 그 이념은 사회주의가 아닌 만주개척이념으로 변한다. 선주의 죽음은 이념적 연애의 메커니즘 속에서 발생한다. 선주가 호화로운 도시 생활에 빠져 있는 이기주의자일 때, 그녀와 남표의 사이는 한없이 멀 수밖에 없다. 이후 선주가 정안둔에서 활동하는 남표의 여러 가지 사업에 적극적으로 찬동할 때, 선주는 남표와 결합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선주가 남표와 결합을 시도하는 순간, 선주는 남표와 경아의 동지적 관계에 개입하게 되고, 이것은 남표와 경아 사이를 방해하던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주가 새롭게 획득한 만주개척이념에 부합하면서도 남표와의 사랑을 유지하는 길은 자살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향사회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 남표는, 조선에서 전망을 찾지 못한 사회주의자들이 오족협화론과 왕도낙토론을 공식 이데올로기로 삼은 만주국에 커다란 기대를 가졌던 역사적 상황에 대응하는 인물이다. 『처녀지』에서 남표가 정안둔 마을에서 실천하는 운동들도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만주에서 꿈꾸었던 여러 가지 기획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처녀지』에서는 노동이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남표를 통해 나타나는 노동과 공동체에 대한 강조는 사회주의와 이기영 문학의 내적인 연속성 측면에서 논의될 여지가 있다. 이러한 집단주의는 사회주의에서 강조하는 공동체와 연대성의 특권적 지점으로서의 노동이라는 이상과 관련된다. 『처녀지』는 철저하게 개인과 공동체라는 이분법에 바탕해 있으며, 이 중 강조되는 가치는 공동체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남표도 만주개척이라는 숭고한 사명을 위해 철저히 도구화된다. 이기영의 일제 말기 생산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노동의 강도와 공적인 가치를 향한 헌신은 점점 그 강도가 높아지고, 결국 『처녀지』의 남표는 죽음에까지 이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표의 죽음은 이기영이 만주를 배경으로 꿈꾸었던 기획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강하게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