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遊山記는 현재 100여 편 이상이 발굴되었다. 그중 서구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으로 인해 국내외 전반에서 심각한 위기를 감지하던 19세기 중반과 20세기 초에는 월등히 많은 양의 작품이 나타나고, 특히 江右 지역 학자에게서 두드러지게 보인다.
19~20세기는 국내외적으로 나라가 어려운 시기였고, 강우지역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학자들은 각각 학풍과 학맥에서 다양한 성향을 견지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유학의 도를 扶持하는 것으로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강우지역의 대표적 유학자였던 南冥 曺植의 학문과 정신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그들에게 있어 남명은 어려운 시기를 굳건한 의지와 실천적 자세로 일관한 선현의 모습이었다. 특히 남명이 지리산 천왕봉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求道의 세계는 당시 강우지역 학자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와 일치하였다. 때문에 이 시기 수많은 강우지역 학자들은 남명을 찾아 천왕봉에 올랐고, 나아가 천왕봉은 남명과 동시에 그들이 추구해야 할 天道의 세계였다.
나아가 한말의 국내외 위기 상황에서 지리산 천왕봉은 당대 지식인의 자존감이자 나라의 상징이었다. 유학자적 관점에서 그들이 인식했던 지리산 천왕봉은 그들이 추구해야 할 道伴으로서의 형상이었고, 이 세상을 主宰하는 天帝의 형상이었으며, 나아가 그들이 존숭했던 聖賢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 한말 강우지역 지식인들에게 지역의 명산이자 민족의 靈山인 지리산이 그리고 지리산 천왕봉이 어떤 의미였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또한 지리산의 정체성 확립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