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후기 영남 지방관이 공무의 일상에서 祈雨祭儀를 어떻게 설행했는지 살펴보려는 의도에서 시도되었다. 그 대상은 주로 영남 지방관으로 재직했던 茝園 吳宖默(1834~?)의 기우제의에 주목하였다. 채원의 기우 의식에 관심을 가지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그는 중앙보다 주로 외직이었던 지방관으로 재직하였고, 그것도 장기간 영남 지방관을 지냈다는 점이다.
채원이 지방관으로서 지냈던 기우제 의례는 공무적이지만, 상당히 역동적이고 탄력적이었다. 지방관이 설행했던 기우제의는 지방관으로서 공무를 수행하는 일상의 의례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 외연에는 사회통합적인 측면을 고려한 지방관의 적극적인 노력과 민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깔려 있었다. 지방관은 한발이라는 자연 재해의 위기에 자신이 주관한 기우제의를 통하여 백성들과 더욱더 가까이 접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특히 채원이 설행했던 두 차례에 걸쳐 별도로 기획된 기우제의는 민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면서도 엄연하게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고, 향촌의 모든 신분 층위[官‧鄕‧吏]가 상호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되었던 것이다.
지방관은 祈雨祭儀 기간에 기우제 설행에 따른 齋戒에 많은 정성을 쏟았지만, 한편으로는 대민 관계에서 세심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가뭄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과일이나 금전을 지급하기도 하였고, 기우제의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백성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부담을 최소화하였다. 이러한 지방관의 기우제의 설행의 일상적 행위는 與民同樂하는 치자의 자세이며 官民이 상호 소통할 수 있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국가나 지방에서 실시하는 관 주도의 기우제 설행에서 祭場의 선택, 祭需의 준비, 祭文의 창작 등은 형식적인 절차와 의식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제의의 구성 요소들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종교적 의례이니 만큼 민간에서 행하는 기우제의 呪術性보다 금기 행위나 신념 체계가 그리 복잡하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제장, 제수, 제차 등은 法典에 정해진 祭式을 그대로 준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가운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제문이다. 제문은 제의의 주관자가 사회적, 자연적, 정치적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었으며, 자신이 旱魃에 대응하는 적극적 관심과 齋戒의 정도를 피력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물론 기우제 제문의 서식이 천편일률적으로 지어져 형식에 얽매인 면이 없지는 않았다. 형식에 급급하거나 산발적으로 기우제를 설행한 경우, 그리고 제문을 식자 계층에서 대작한 경우에는 한발에 대한 인식과 그 대응 방식을 규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장기간 동안 수차례 기우제를 설행하면서 지방관이 직접 지은 제문에서는 이러한 면을 추출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정식 13차 기우제의를 마친 후, 별도로 기획된 두 차례 기우제의의 제문은 앞서 설행하였던 정식 제의의 제문에 비해 자유로운 산문 형식이다. 아울러 분량 역시 장문이면서 탄력적인 내용으로 祈雨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였다. 자연에 대한 지방관의 인식은 유교적 이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였다. 그래서 한발은 백성들의 죄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죄로 돌렸다. 한발로 흉년이 들면 신에게 바칠 제물조차 없게 됨으로 신에게도 해가 있을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결국 지방관은 신과 인간은 서로 상보해야 하는 관계로 인식했던 것이다.Through this article, I investigated how Youngnam reeves performed ritual for rain as a official business. To do this I focused on the rituals of Chaewon Oh Hoing-Mook (1834~?), who was reeve of Youngnam province.
Oh's ritual was official, but dynamic and flexible. In a aspect Oh's ritual for rain was one of his routine jobs. In other aspect, through his ritual, Oh tried to establish social integration with consideration for the subjects. The ritual for rain was performed when drought kept going on. In this natural crisis. he held the ceremony to meet the subjects face by face. Through two additional ritual, especially, he preserved social order, and took care of the subjects preferentially. All social class people can also meet each other in the ritual.
Performing the ritual with highly established form, he also gave great concern to the subjects. He gained sympathy of the subjects's pain, and paid fruits or money. He also minimized the subjects's burden loaded to them. In these his routine rituals, I can know that reeves shared their joy with the subjects and communicated each other.
It is fundamental procedure to choose ritual place, to prepare things needed in the ceremony, and to write a ritual oration in the official ritual. It is common to prepare ritual place, things needed in ritual, and order of ritual according to law books. The ritual was based on Conficianism, therefore taboos or belief system of official ceremony was less restricted than those of private ceremony. One of remarkable thing is ritual oration. After 13th ritual, the two additional rituals was executed. In those rituals, the formality of orations were less strict than that of previous 13 rituals. He showed his wish for raining with the ritual oration, which had long sentences and flexible contents. Reeves usually understood the Mother Nature in aspect of Confucianism. Eventually, reeves recognized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human as a reciprocal intera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