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漢地에서 율장의 전역과 江南지역에서 『십송율』의 성행에 대해 살펴보았다. 기존에 ‘經典’ 중심의 구법과 역경 활동이 5세기 초부터 점차 율장에도 주목하게 된다. 그 원인은 교권과 황권의 모순을 해결하려는데 있다. 불교계는 주체적으로 僧團의 질적인 향상을 통해서 교세를 발전시키려 하였다.
晋末宋初에 무분별한 승려들의 출가는 승단의 질적 수준을 저하시켰다. 교단의 自淨 능력의 부족으로 세속 통치자들의 간섭은 독립을 추구하는 승단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모든 구성원에게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여 교단의 청정을 보장할 수 있는 계율이 필요하였다. 교세의 확장은 승단 구성원들에 대한 합법성의 논란을 일으켰다. 한인 승려, 특히 비구니들은 보다 완전한 율장을 갖춤으로써 ‘邊地’라는 인식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中國化’하고자 하였다. 5세기 초에 다수의 광율이 전역된 것은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 또한, 소승 율승들도 불교의 弘傳을 위해 스스로 東來하였다. 불전에서 선교를 강조했던 것은 천축과 서역의 승려들이 적극 대외 선교에 나서도록 하였다.
有部계통의 계본은 4세기 중반부터 점차 漢地에 전역되었다. 이것은 광율들 중에서 『십송율』이 가장 먼저 전역되고, 널리 유포될 수 있는 좋은 배경이 되었다. 『십송율』의 전역과 유포에는 鳩摩羅什과 卑摩羅叉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구마라집은 일찍이 『십송율』을 수학하였지만 율장에 대한 이해나 준수는 철저하지 못했었다. 이것은 그가 바라이죄인 婬戒를 범한 것이나, 『십송율』을 전역하면서 스스로 胡本을 誦出하지 못했던 것이나, 스스로 『십송율』의 善本을 결정하지 못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십송율』의 善本은 구마라집의 입적 후 비마라차가 남방 壽春의 石澗寺와 江陵의 辛寺에 머물면서 조문을 刪削하여 만들었고, 널리 유포하였다. 그에게 『십송율』을 聽講했던 慧觀·慧猷 등이 강남에 이것을 널리 선교하면서 『십송율』은 점차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십송율』은 강남에서 陳代 이후까지 성행하였다. 宋ㆍ齊시기 한인 율승은 28명이었다. 유송시기는 15명으로, 11명이 『십송율』을 전공하고, 1명은 『승기율』을, 3명은 율장에 뛰어났다. 십송율사들은 주로 불교 유입처인 凉州와 촉군, 교통의 요충지인 강릉, 수도 건강과 士族의 활동공간인 吳 등지의 長江유역 각 重鎭에서 활동하였다. 남제시기 율승은 13명으로, 8명이 『십송율』을, 1명은 『승기율』을, 3명은 율장에 뛰어났고, 1명(暉律師)은 행적이 미상이다. 남제의 십송율사들은 대부분 건강과 그 인근지역에서 활동하였다. 志道는 태무제의 폐불 이후 북방에서 불교를 부흥시킬 때 율장의 복원에 공로가 있었다. 이것은 남북의 정치적ㆍ군사적 대치국면 속에서도 율장을 매개로 한 문화교류가 부단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속고승전』권21에는 梁代에 法超ㆍ道禪, 陳代에 曇瑗ㆍ智文 4명만 수록하지만 양대의 지장ㆍ명철ㆍ승변ㆍ(법)총 등도 실재로 『십송율』에 뛰어났다. 양대 십송율사는 지칭 문하의 법초ㆍ법총ㆍ승변 등과 승우 문하의 明徹ㆍ智藏 등으로 대별되었다. 또한 양대는 비구니들의 『십송율』수지도 주목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니승교단의 질적 수준과 청정한 승단의 위상을 향상시켰고, 비구 승단에서 독립된 尼僧僧官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陳의 武帝ㆍ文帝는 帝位 찬탈과 안정을 위해서 각종 齋會를 이용했는데, 이것은 붕괴되었던 불교계의 역량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다시 단의 폐단이 발생하자 통치자들은 曇瑗과 智文 등의 십송율사를 등용하여 승단을 정비하고자 하였다. 율승들은 통치자들의 불교정책에 호응하면서 한편으로는 통치자들의 사원경제 혹은 노동력을 침탈하는 것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강남지역에서 『십송율』의 번성은 몇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십송율』계통의 율서가 일찍부터 한지에 유포되었고, 구마라집이 혜원으로 대표되는 불교계의 지원 속에서 광율을 전역하였고, 유송 통치자와 친밀했던 혜관 등이『십송율』의 유포에 적극 동참했기 때문이다. 둘째, 『십송율』은 다른 광율에 비해서 경제적인 제약이 심하지 않았다. 율장에는 ‘金銀’ㆍ‘販賣’ 등과 관련된 조항이 있는데,『팔리율』『승기율』이 가장 엄격하고, 『사분율』은 그 다음이고, 『십송율』이 가장 완화된 입장을 취한다. 남조이래로 강남지역은 이 활성화 되고, 화폐 사용이 발달했기 때문에 僧俗은 『십송율』의 도입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교리적으로도 『오분율』은 여성의 成佛 가능성을 절대 부정하였고, 『사분율』도 팔경법에 있어 『오분율』과 동일한 입장이었다. 비록 『십송율』은 ‘轉成男子身’의 조건이 있지만 여성의 성불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여성의 수계에서도 『사분율』을 비롯한 대부분의 광율은 ‘二衆受戒’를 주장하지만 『십송율』은 그런 제약이 없었다. 『십송율』이 여성들에게 관대한 입장을 취했던 것은 강남에서 『십송율』이 성행할 수 있는 중요한 인이 되었다.本文研究了在漢地的律藏的傳譯和在江南地區的十誦律的盛行. 以往以‘經典’爲中心的求法和傳譯活動從5世紀初逐漸轉爲關注律藏. 其原因在於解決教權和皇權的矛盾, 佛教界主動通過僧團質量的提高, 是爲了發展教勢.
到晉末宋初, 無分別的僧呂的出家是增加教團內部腐化․墮落的要素. 由於教團自淨能力的不足,世俗統治者的干涉對追求獨立的僧團具有很大的威脅. 因此, 爲了所有成員以保持絕對權威, 需要保障教團清淨的戒律. 教勢的擴大引起了對僧團成員合法性的爭論. 漢人僧呂, 特別是比丘尼, 希望通過具備更完全的律藏, 克服‘邊地’認識, 把自己進行了‘中國化’. 在5世紀初, 多數廣律的傳譯是這種努力的結果. 並且小乘律僧也爲了佛教的弘傳, 親自來到漢地. 在佛典裏強調的傳教對天竺和西域律師勉勵積極的對外傳教.
有部系統的戒本從4世紀中期逐漸傳譯到漢地. 這是在廣律中十誦律最早傳譯, 廣泛傳播的基礎. 在十誦律的傳譯和傳播中, 鳩摩羅什和卑摩羅叉的貢獻很大. 鳩摩羅什曾經學過十誦律, 但是對律藏的理解和實踐不徹底. 這件事可以知道通過他犯了淫戒、在十誦律的傳譯中不會親自誦出胡本、不會親自決定十誦律的善本等. 十誦律的善本在鳩摩羅什的入寂後, 卑摩羅叉在南方的壽春石澗寺和江陵辛寺整理條文, 廣泛流傳. 向他受學的慧光、慧猷等, 在江南傳教的同時, 使十誦律逐漸具備了發展的根底.
在江南的十誦律到陳代以後也仍然盛行. 宋․齊時期, 漢人律僧有了28名. 劉宋時期15名, 其中, 11名專攻十誦律、1名專攻僧祇律、3名卓越於律藏. ‘十誦律師’大部分活動在佛教流入處的涼州和蜀郡、交通要地的江陵、首都建康以及士族活動地區的吳等地的重鎮. 南齊時期13名, 其中, 8名專攻十誦律、1名專攻僧祇律、3名卓越於律藏、1名(暉律師)行跡不詳. 南齊十誦律師在建康和其鄰近地區大部分活動. 志道於太武帝毀佛之後復興佛教的時候,對回復律藏做出了貢獻. 律藏在南北政治、軍事的對峙局勢中, 也起到了南北文化交流的作用.
在續高僧傳卷21中, 雖然只收錄了梁代的法超․道禪, 陳代的曇瑗․智文四位僧侶, 但是梁代的智藏․明徹․僧辯․(法)聰等也實際上對十誦律貢獻卓越. 梁代的十誦律師大致分爲以智稱門下的法超․法聰․僧辯等和僧祐門下的明徹․智藏. 並且梁代的比丘尼以十誦律的受持受到了關注. 因此, 尼僧教團的質的水平和清淨僧團的地位得到提高, 從比丘僧團也開始具備獨立的尼僧僧官. 陳的武帝․文帝爲了帝位篡奪和穩定, 利用了各種齋會, 這件事給回復瓦解了的佛教界的力量提供了好機會. 但同時又發生僧團的弊端, 統治者通過提拔曇瑗․智文的十誦律師, 希望肅整僧團. 律僧一邊響應統治者的佛教政策, 一邊對統治者對寺院經濟或者勞動力的侵奪進行抵抗.
在江南地區, 十誦律繁盛有以下幾個原因. 第一, 十誦律系統的律書曾經流傳於漢地, 鳩摩羅什在以慧遠爲代表的當時佛教界的支援中傳譯了廣律, 與劉宋統治者有了親密關系的慧觀等積極參與十誦律的流傳. 第二, 與別的廣律比較起來, 在經濟方面的限制沒那麼嚴格. 在律藏裏, 有了‘金銀’、‘販賣’等的條款, 巴利律、僧祇律采取最嚴格的觀點, 四分律其次, 十誦律采取最緩解的觀點. 因爲在南朝以來的江南地區, 商業激活, 貨幣使用發展, 所以僧呂對十誦律的引進更積極努力. 在教理方面, 五分律完全否定女性成佛的可能性, 四分律也包括八敬法在內, 與五分律幾乎采取同一觀點. 雖然十誦律有了‘轉成男子身’的條件, 認定女性成佛的可能性, 並且在女性們受戒, 以四分律爲首的大部分的廣律堅持‘二眾受戒’, 但是十誦律卻沒有那樣限制. 十誦律對女性們采取寬大的觀點,這也是十誦律在江南地區可以盛行的主要原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