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觀龍寺는 흔히 ‘신라 8대 사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고 창건 이후의 연혁도 영세하여 신라 古刹로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창녕은 낙동강 중류에 위치한 전략요충지였다. 자연히 창녕에는 신라 왕실이나 중앙 정부, 왕경 사찰의 관심이 적지 않았다. 관룡사의 寺格은 이러한 점을 염두하고 살펴야 한다.
창녕의 진산인 火王山 동쪽에는 관룡사가 있다. 이 절에는 연못 세 곳에서 용이 나타나 ‘관룡사’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관룡사는 탈해왕 40년, 흘해왕 40년, 진평왕 5년에 각각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신라가 탈해왕과 흘해왕 때 낙동강 유역까지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웠다. 창녕 일대를 지배하였던 것은 진흥왕 때 전후이므로, 元曉와 관련된 ‘관룡사’의 寺名 변경은 진평왕 이후에나 가능하였다. 관룡사에는 현재 2구의 불상이 있는데, 받침대에는 불상 조성 연도와 관련된 명문이 새겨져 있다. 받침대의 모습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두 불상은 서로 다른 시기에 조성된 반면 받침대는 성덕왕~혜공왕 때 연이어 만들어졌다. 관룡사는 성덕왕 때 龍船臺에 조성・봉안된 석조 여래좌상을 찾는 순례자나 기도자들이 머무는 사찰로 기능하였다가, 경덕왕 때 寺域을 넓히고 전각을 건립하면서 중창되었고, 혜공왕 때에도 불상을 조성하는 불사가 계속되었다. 그 뒤 고려 초기까지 여러 불사가 이어졌다. 관룡사는 신라 중고 말에 창건된 이래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초기까지 창녕 지역의 주요 사찰로 기능하였다.
창녕은 낙동강의 동쪽에 위치하는데, 강 건너편에는 會川과 黃江, 南江 등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들 지류는 김천, 거창, 합천, 함양, 산청, 진주, 의령 등지로 진출하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다만 창녕은 현풍의 琵瑟山에서 영산의 靈鷲山까지 남북으로 흐르는 산줄기를 중심으로 대구나 청도와는 구분되었다. 산줄기와 강줄기에 따라 琴湖江이나 密陽江을 따라 낙동강으로 나왔던 사람과 물산은 회천, 황강, 남강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창녕을 거쳐야만 했다. 창녕은 추풍령, 덕유산, 지리산 방면을 잇는 중요한 전략요충지였으므로, 창녕의 불교 문화도 이러한 자연지리적 조건의 영향을 받았다.
창녕 仁陽寺에 머물던 順表는 혜공왕 때부터 40년 동안 많은 재화를 주변의 사찰과 왕경의 사찰에 보시하였다. 이를 통해서 인양사는 신라 왕실은 물론 중앙 정부의 관심을 받았다. 자연히 창녕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던 관룡사도 신라 왕실이나 중앙 정부, 왕경 사찰과 연결되었다. 원효는 관룡사에서 ≪화엄경≫을 강경하였는데, 창녕의 주변에는 몇몇 화엄사찰이 위치하였다. 합천 海印寺 창건에는 신라 왕실이 깊이 관련하였다. 신라 왕실은 해인사보다 앞서 창건된 고령의 盤龍寺에도 직접적인 지원을 하였다. 특히 해인사와 반룡사에는 신라 말은 물론 고려 말까지 賢俊과 決言, 體元 등이 머물면서 왕실이나 중앙 관료와 연결되었다. 한편 창녕 북쪽의 비슬산이나 남쪽 영취산에도 道成・辛旽 등의 승려, ‘華嚴十刹’의 하나로 불린 玉泉寺 등이 머물거나 자리하였다. 이들 사찰과 승려는 의상의 화엄사상과 관음신앙을 내세우면서 화엄불교의 전통을 꾸준히 유지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원효와 관련된 관룡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관룡사는 낙동강의 전략적 이점을 고려한 왕실이나 중앙 정부, 왕경 사찰의 관심을 받았기에 ‘신라 8대 사찰’로 불릴 수 있었다.昌寧観竜寺はよく‘新羅8代寺刹’で知られている。しかしその根拠が明確ではなくて創建以後の沿革も零細して新羅古刹として何の注目を受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昌寧は洛東江中流に位した戦略要衝地だった。自ずから昌寧には新羅王室や中央政府, 王京寺刹の關心が少なくなかった。観竜寺の寺格はこのような点を念頭と察しなければならない。昌寧の鎭山である火王山東には観竜寺がある。このお寺には池三つの所で竜が現われて‘観竜寺’と呼ばれたという話が伝わっている。観竜寺は脱解王40年, 訖解王40年, 真平王5年にそれぞれ創建になったと言うが, 新羅が脱解王と訖解王の時洛東江流域まで影響を及ぼすことは難しかった。昌寧一帯を支配したことは真興王の時の前後なので, 元曉と係わる‘観竜寺’の寺名 変更は真平王以後にでも可能だった。観竜寺には現在二躯の仏像があるのに, 台座には仏像造成年度と関連になった銘文が刻まれている。台座の姿が似ていることで見て, 二つの仏像はお互いに違う時期に造成になった一方台座は聖徳王~恵恭王の時ぞくぞく作られた。観竜寺は聖徳王の時竜船台に造成奉安になった石造如来坐像を捜す巡礼者や祈祷者らがとどまる寺刹で機能してから, 景徳王の時寺域を広げて 殿閣を建立しながら重創になったし, 恵恭王の時にも仏像を造成する仏事が続いた。その後高麗初期まで多くの仏事がつながった。観竜寺は新羅中古末に創建になった以来統一新羅時代を経って高麗初期まで昌寧地域の主要寺刹で機能した。昌寧は洛東江の東に位するのに, 川の向こう側には会川と黄江, 南江などが洛東江で流れこむ。これら支流は金泉, 居昌, 陜川, 咸陽, 山清, 晉州, 宜寧 等地で進出する交通路で利用になった。ただ昌寧は玄風の琵瑟山で霊山の霊鷲山まで南北で流れる山なみを中心に大邱や清道とは区分になった。山なみと川筋によって琴湖江や密陽江に付いて洛東江で出た人と物産は会川, 黄江, 南江で渡るために昌寧を通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昌寧は秋風嶺, 徳裕山, 智異山方面を引き継ぐ重要戦略要衝地だったから, 昌寧の仏教文化もこのような自然地理的條件の影響を受けた。昌寧仁陽寺にとどまった順表は恵恭王の時から40年間多い財貨を周辺の寺刹と王京の寺刹に 布施した。これを通じて仁陽寺は新羅王室はもちろん中央政府の関心を受けた。自ずから昌寧の代表的である寺刹だった観竜寺も新羅王室や中央政府, 王京寺刹と連結になった。元曉は観竜寺で≪華厳経≫を講経したが, 昌寧の周辺にはいくつかの華厳寺刹が位置した。陜川海印寺創建には新羅王室が深く関連した。新羅王室は海印寺より先立って創建になった高霊の盤竜寺にも直接的である支援をした。特に海印寺と盤竜寺には新羅末はもちろん高麗末まで賢俊と決言, 体元などがとどまりながら王室や中央官僚と連結になった。また昌寧北の琵瑟山や南側霊鷲山にも道成辛旽などの僧侶, ‘華厳十刹’のひとつの玉泉寺などがとどまるとか参席した。これら寺刹と僧侶は義湘の華厳思想と観音信仰を立てながら華厳仏教の伝統を倦まず弛まず維持した。このような傾向は元曉がとどまった観竜寺にも影響を与えた。このように観竜寺は洛東江の戦略的利点を考慮王室や中央政府の關心を受けたから‘新羅8大寺刹’と呼ばれることができ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