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재소 고려인 사회주의자 계봉우가 소련의 민족정책 하에서 소비에트 문화와 결합한 민족문화를 창출해 가는 과정을 밝히기 위해, 1920년대 후반에 공시적 예술운동의 일환으로 시도된 조선 시가 연구와 해방 후 조선학의 통시적 체계화의 일환으로 완성된 조선문학사 기술의 관련성을 규명한 것이다.
흔히 토착화로 불렸던 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에 걸친 소련의 소수민족정책은 연해주 고려인 사회에 민족 자치에의 희망을 품게 했고 그것은 소비에트화를 전제로 한 민족문화 창출에의 의지로 이어졌다. 고려어 교원이었던 계봉우는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고려어 보급을 위한 교과서 편찬 및 언어 정리 통일의 과제에 부심했다. 또한 1928년부터 문화혁명의 기치아래 추진된 반종교 투쟁과 예술운동에 관여하여, 조선의 미신(종교)과 평민문학을 연구하였다. 계봉우는 과거 문화에 대한 역사 기술은 계급투쟁과 새로운 소비에트 문화 건설의 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노래운동의 일환으로 행해진 평민문학 연구에서는 평민계급의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담고 있는 구비문학, 그중에서도 특히 타령을 가장 강조하며, 그 형식을 살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 이념에 맞게 창작되어 새 시대에 활용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과거문화의 가치와 그 연구에 집착하는 계봉우는 고려인 사회의 헤게모니가 급속히 국제공산주의 세력으로 이동하면서 문화혁명에 방해가 되는 구시대적 지식인으로 간주되어 주변화되어 갔다.
37년 대숙청과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후 소련의 동화정책 속에서 조선말=조선민족이 쇠퇴하리라는 위기감을 안고 있던 계봉우는 조선의 해방을 접하고 극도의 감격과 조국 귀환의 곤란함을 동시에 맞보며 조국 귀환의 일환으로 조선학 연구를 체계화하였다. 그것은 조선에 새로 탄생한 인민공화국의 정당성을 학문적으로 보증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일환으로 완성된 조선문학사는 연해주 시절의 그것과는 달리 계급적 관점이 관철되지 못하고 민족문학의 진화론적 발달사로서 서술되어 있다. 조국해방은 민족 내부의 균열 못지않게 해방된 피압박민족이라는 단일성에의 지향을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