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 형성을 주도했던 김복진은 식민지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미술을 구상하면서 유럽과 러시아에서 전위를 표방하고 나선 신흥미술 운동들—미래파, 다다, 표현주의, 구성주의—를 적극 참조했다. 특히 그는 다다와 구성주의에 주목했는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미술이 낡은 것들의 파괴(다다)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건설(구성주의)이라는 두 과제를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곧 균형은 깨지고 김복진은 파괴보다는 건설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전환한다.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서 ‘삶과 예술의 통합’이라는 구성주의의 슬로건을 현실에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실제로 카프 미술가들은 개인주의에 입각한 순정미술을 배격하고 “총과 마차로 그림을 그리는”(임화) 구성주의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이것은 일본에서 다다를 모델로 삼았던 마보가 해체되고 구성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미술의 대안으로 부각된 양상에 대응한다. 이러한 입장 전환은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파괴(다다) 이후에 도래할 프롤레타리아 미술로 표현주의를 내세운 김용준 등의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곧 카프 미술가들의 실천을 이끈 지도 이념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서 구성주의가 표방한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건설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에 카프미술가들은 ‘선전-선동’의 예술형식, 즉 포스터나 무대미술 등을 통해 ‘삶과 예술의 통합’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투쟁의 시기가 종료되면 선전-선동의 예술형식으로부터 구성-건설의 예술실천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일제의 카프탄압과 혁명운동의 실패로 이러한 이상은 현실화될 수 없었고 구성주의가 추구하는 ‘삶과 예술의 통합’은 미완의 기획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