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단토(Arthur C. Danto)와 한스 벨팅(Hans Belting)이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 이후에도 드로잉은 국내외 동시대미술전시에서 대거 수용되고 있다. 단토와 벨팅이 말한 종말론은 다원주의시대의 다름 아니라고 하더라도 드로잉은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헤겔(Hegel)이 남겨놓은 예술정의에 관한 범주설정의 문제가 20세기 말 단토와 벨팅에 의해 예술종말 혹은 미술사의 종말로 독해되었지만, 그들이 선언한 예술의 종말론은 전시문맥과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헤겔이 나자렛화파의 전시를 보면서 종말을 선언하였듯이, 단토는 1962년 뉴욕의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앤디 워흘의 작품과 상품사이에 외적으로 어떠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역사적 내러티브의 종말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한스 벨팅은 1979년 2월 15일 페티 살레(Petite Salle)의 퐁피두센터 전시장의 퍼포먼스에 주목한다. 살레가 자명종 시계로 “미술의 역사가 종식”했음을 선언한 것이 벨팅은 미술사 혹은 미술학(Kunstwissenschaft) 종언의 예문으로 독해한다.
현대미술전시에서 드로잉의 위상이 부상하고 그리고 문화형식으로서 미술전시에 드로잉이 대거 수용된다고 하더라도 드로잉에 대한 미학적 평가기준은 오랜 역사를 관통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드로잉은 회화나 조각과 건축과는 달리 선으로 대상을 형상화하여 미술작품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부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어원적으로도 드로잉은 톤과 색으로 모티브를 표현하는 회화와는 달리 선을 긋는 것에 준하여 그래픽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미술이 역사성을 지닌다는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oelfflin)도『미술사의 기초개념(Kunstgeschichtliche Grundbegriffe)』에서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미술로의 이행을 선적인 것이 회화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풀어냈을 정도다. 그의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개념들은 촉각적인 요소와 시각적인 요소로 발전하는 미술의 역사를 담보하지만, 선적 양식은 형태들이 명료하게 구분되는데 반해, 회화적 양식은 사물 사이의 운동을 포착하기 때문에 양식사에서조차도 드로잉은 미술작품의 종속개념으로 취급당했다. 게다가 17세기 이후 미술아카데미에서 조차도 드로잉을 교과목으로 수용하였지만 온전한 예술형식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는 적어도 19세기까지 드로잉을 분리하여 회화에 우선권을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드로잉의 가치를 새롭게 고찰하게 한다. 미술대학에서 조차도 하위개념으로 수용되었던 드로잉, 습작이나 스케치로 간주된 미술대학의 교육과정에 반발한 젊은 세대들에 의해 마침내 전통 예술론과 결별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작가인 세잔느는 드로잉이 선의 원칙이라는 관습에 의혹을 품으면서 색으로 드로잉을 시도하였고, 그리하여 반 고흐는 드로잉과 회화를 넘나드는 작업방식에 천착하게 된다. 오랜 논쟁의 대상인 “드로잉 VS 회화”에서 선인지 색채가 우선인지 의문이 시각적으로 공식화된다. 조형요소인 선과 색이 공존하면서 회화와 드로잉 사이의 이론적인 경계가 20세기에 들어와 해체된 것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드로잉에 관한 이론이 부재한 상황에서 세잔느로 이어지는 현대미술은 드로잉에 관한 범주를 인식하는 창구인 셈이다.
이 연구는 현대미술문맥에서 드로잉의 가치와 미학적 평가기준에 초점을 맞추었다. 현대미술전시에서 드로잉의 가치가 부각되어 행위의 결과물이 아니라 창작의 범주가 예술정의에 수용된다. 드로잉의 미학적 평가기준은 양식사로서의 미술의 역사, 철학과 미학적 종말론에서의 미술전시, 과거와 단절을 선언한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예술에서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성찰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