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에서는 수도 한성의 세 객관-태평관, 동평관, 북평관-이 태조~세종대 형성되는 과정과 그 의미를 살펴 보았다. 이 세 객관의 체계는 고려 말 이래의 국제질서에 대한 구상 속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세종대 완성되었다가, 17세기 임진왜란 및 명・청 교체를 거치며 모두 사라졌다. 조선은 건국 후 개경의 정동행성을 바꾸어 태평관을 설치하여 명 사신의 접대를 준비하였다. 이는 공민왕대 이래 고려・명의 관계를 책봉-조공체제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반영된 것이었다. 고려 시기의 것을 인습적으로 따라 지은 태조대의 한성의 태평관은 태종과 세종대 수리되었다. 태종대 수리는 예제보다는 미학적인 목적이 컸으며 아버지의 장소를 지우고 자신을 현창하는 공간을 만들려고 한 것과 관련이 깊었다. 이에 비해 세종대 수리는 본격적으로 명의 사신 의례가 확대 설행되면서 이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평관과 북평관은 조선 초부터 태종대까지는 건립 계획이 분명하게 서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세종대 후반 왜인과 야인 접대를 위한 관서를 두고 동평관의 이름을 바꾸며 북평관을 건립하면서 그 체계를 갖추었다. 이는 일본, 여진에 대한 압박과 회유를 통해 교류 체계를 갖추면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세종대 완성된 국제질서의 이념형은 태평-동평-북평이라는 세 객관의 이름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조선이 중심이 되어 책봉-조공체제의 형식으로 事大字小의 내용을 실천함으로써 조선・명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조선의 주변국, 혹은 주변의 집단도 안정시킴으로써 동쪽의 평화와 북쪽의 평화, 궁극적으로는 천하의 태평을 구축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