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920년대 초 국외 항일운동의 핵심 지역은 북간도와 서간도였다. 북간도는 주로 함경도・평안도와 서울・경기 지역 출신들이 이주하여 한인사회가 형성된 반면, 서간도는 신민회와 연결된 경북인들의 집단 이주를 통해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서간도에서 항일운동 은 주로 신민회와 경북인들의 관계를 통해 조명되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서간도의 항일 세력은 대종교와 긴밀한 관계에서 형성되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경북에서 이주한 ‘혁신유림’들이 대종교인으로서 혹은 대종교와 관계 속에서 1910년대 서간도의 독립군기지 건설을 추진했고, 나아가 이들이 3・1만세운동 이후 항일무장 세력으로 전환한 뒤에도 북간도의 대종교계 무장세력과 연결되었던 점을 밝혔다.
본 논문에서 논의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북지역의 대종교 수용과 확산의 주도세력은 근대적 신교육을 받은 ‘혁신유림’들이었다. 또한 경북 지역의 특성상 문중의 일가친척 중심으로 대종교 교인이 형성되었다.
둘째, 서간도에서 환인・유하・통화현 세 곳은 1910년대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된 곳이다. 그 배경에는 만주가 역사적으로 ‘한국인의 고토 지역’이라는 인식이 작용했다. 이와 관련하여 환인현에서는 동창학교가, 유하현에서는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었고, 그 위에 군사교육과 민족교육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참여했던 주요 인물들은 대종교 본사에서 윤세복, 그리고 경북 대종교인으로서 김동삼, 김정식, 류인식, 이동하 등과 신민회 출신이자 대종교를 신앙했던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이장녕 등이었다.
셋째, 3・1만세운동 이후 항일무장세력이 형성되는 가운데 서간도에는 서로군정서가, 북간도에는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가 양대 독립군 단체로 부상하였다. 두 단체는 사관학교를 둔 정예 독립군부대라는 동질성과 대종교 신앙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결과 두 단체는 청산리전투 직전 서・북간도 독립군단체들 가운데 유일하게 통합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