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1월 미국의 JDR3세기금에서는 노리스 호튼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유치진의 지속적인 지원금 요청에 대응하여, 한국의 연극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드라마센터가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직접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1966년 6월 18일부터 29일까지 서울에 머문 노리스 호튼은 드라마센터를 방문하였고, 다수의 연극담당자 및 문화 관계자들을 만난 결과를 토대로 하여 유치진과 드라마센터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호튼 보고서에서는 드라마센터가 유치진에 의해 독점되어 공공성의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노리스 호튼은 유치진이 재단법인 한국연극연구소의 이사회를 장악하여 드라마센터를 사실상 사유화하고 있으며, 파벌주의에 기대어 드라마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로 인하여 다수의 젊은 연극담당자들이 드라마센터를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므로, “학교와 연극의 결합”으로 한국 연극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원래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노리스 호튼은 유치진의 은폐된 욕망을 정확히 파악하였다. 그는 유치진이 한국 연극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으며, ‘자기의 드라마센터’를 굳건히 만드는 데 지원금을 사용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노리스 호튼에게 제시한 「한국에서 드라마센터」는 ‘자기의 드라마센터’를 강화하기 위한 계획서와 마찬가지였다. 유치진이 한국연극연구소 이사진을 개편하여 공공성을 확보하는 방안에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자기의 드라마센터’를 지키는 중요한 도구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63년 11월에 학교법인 한국연극연구원의 드라마센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금 요청은 재단법인 한국연극연구소 이사장 명의로 이루어진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하고 있다.
호튼 보고서에 나타난 드라마센터의 공공성에 대한 유치진의 인식은 특별하다. 그는 ‘한국 연극 발전에 대한 사명감’으로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고 드라마센터를 만들었으며, ‘나의 드라마센터’를 유지하는 것도 자신이 맡아야 할 마땅한 임무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드라마센터가 폐쇄적 방식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고, 드라마센터의 공공성은 점점 더 훼손되어간 것이다. JDR3세기금에서는 유치진의 지원 요청을 거절함으로써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