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렬은 을미의병기에 활동한 호좌의진[제천의병]의 간부로서, 영남 쪽의 의병사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소모부대[召討陣]를 이끌고 남하하여 예천에서 영남 북부 7 고을의 의병부대와 회맹하고, 그 지도자가 되어 태봉 전투를 주도했고, 적극적인 투쟁 노선을 이끌었다. 태봉 전투의 실패 뒤에도 전투적 투쟁 노선을 계속 밀고 나갔다.
의병 해산을 위해 내려온 관찰사는 영남의 여론 주도층과 서상렬을 이간시켰다. 영남의 의병부대는 명문가의 자손들이 주도했고, 문중의 의견을 반영하는 향론에 따라 의병을 조직하고 운영했다. 결국, 안동권 의병을 주도하던 안동·예안의병의 지도부가 동요했다. 해산을 요구하는 관찰사 쪽의 회유, 京軍의 군사적 압박과 수탈은 영남 쪽 의진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선택을 강요했다.
서상렬은 여러 차례 연대를 위한 義陣會議를 추진하고 참여했다. 예천 회맹 때 내세웠던 명분과 소토진의 강력한 무력이 그가 지닌 힘이었다. 그러나 결국 연대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영남의 의진들은 투쟁의 방략을 정할 때도 향론을 중시했고, 군수 비용도 주요 문중들이 분담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이는 비타협적인 투쟁 방식, 의병 활동에 국가의 재물을 당연히 쓸 수 있다는 호좌의진의 방식과 크게 달랐다. 아울러 소토진과 연대하거나 결합한 호파 계열의 인물들, 비주류 쪽 인물들, 향리 출신 등은 영남 주류 세력의 경계감을 불러일으켰고, 屛虎是非와 같은 영남 내부의 갈등은 연대를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서상렬의 실패는 영남의 의병이 급격히 쇠퇴하는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