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식민지 프로문학에서 여성작가가 꼽아지지 않았으며, 해방을 맞은 여성작가 역시 여성 사회주의자를 다루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물론 이는 식민지 매체 장의 형성과 그 탈식민의 효과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식민지 근대성의 핵심으로서 여성작가들을 비롯한 ‘여류’들이 부상했지만, 해방직후에는 그 체제와의 친연성을 이유로 활발히 나서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발언의 자리는 다시 돌아온, 스스로를 드러낸 몇몇 여성 사회주의자들에게 잠시나마 주어졌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우남북으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에서 여성 사회주의자들도 다시 몸을 숨기고, 그들을 중심으로 내세우는 서사들도 계속해서 조밀하게 짜여지지 못했다. 좌파 여성작가는 다시 몸을 숨기고, 우파 남성작가들은 재차 우파 여성작가들을 호명한다. 좌파 남성작가들은 여성대중의 군집적 힘을 강조했지만,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이념적 목소리를 드러내는 장면은 그리지 않았다. 사실 해방 당대에는 정치적으로 ‘좌우간(左右間)’의 서사들이 더 많았다.
이러한 한계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사회주의에 근거해 써내려갔던 여성들이 있다. 바로 고명자(1904-?)와 최화성(1923-?)이 그랬다. 전자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했지만, 다시 삼팔선 이남으로 돌아왔다. 반면 후자는 우파 여성운동에 투신했던 박승호의 딸이면서도 여성해방 이데올로그로서 여동생들과 월북을 감행한다. 결국 삼팔선을 사이에 둔 고명자와 최화성의 선택은 달랐다. 그러나 탈식민의 역설을 껴안고 이들이 짧게 제출했던 글들은 해방기 서사의 빈 곳을 메우며, 사회주의적 전망에서 여성해방이론을 전개한 여성작가의 존재를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