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장은 기와를 만드는 장인이며, 기와는 건물의 지붕을 마감하는데사용되는 건축부재이다. 기와는 대개 권위건축물에만 한정적으로 소비되며, 그 건물은 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와가 가진 위상을 가벼이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기와에 대한 연구는 문양을 중시하는 미술사적 시각과 제작기법에 무게중심을 두는 고고학적 관점이 교차하고 있다. 그런데 문양이나 제작기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와를 제작했던 조직에 대한복원이다. 사료의 영성함은 고대사회를 복원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와에서 명문이 확인되는 경우가 있어 주목을 요한다. 문자 기와는 후대에 정리되는 문헌사료와는 달리 당대인이 직접 서사했다는 점에서 1차 사료에 비견될 수 있다. 명문의 내용은 주로 제작 일시, 시주자, 제작처, 공급처, 제작자 등인데, 제작자인 와장의 경우 기와를 제작하던 조직체계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다.
문자 기와에서 확인되는 와공들의 유형을 정리해 보면 官匠과 僧匠, 私匠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관장이 국가의 공권력이 개입하여 기와를 생산하였다면, 승장은 승단의 통제아래 사역되었다. 이에 반해 사장은 육요, 와소 등의 공적 생산체제가 이완되면서 등장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공적 생산체제가 이완되면서 私匠은 오키나와 우라소에성에서출토된 고려와장명 기와가 대표적이다. 기와에 국가명을 드러내고 있는 것에서 국내 유통용이 아니라 대외용이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오키나와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판매용의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있다. 이러한 사장의 등장 배경에는 과중한 수탈과 권력자의 늑탈로인한 와소의 해체에 있다. 국가적 차원의 공적 생산체제의 이완은 기와를 판매의 대상으로 부각시켰다. 단적으로 12세기에 죄인의 속량에‘贖銅瓦徵’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편 관장과 승장들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별와요로 대표되는 기와가마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국가의조와체계에 흡수된 인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