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완도의 장보고 중심 역사인식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고려 후기 완도 법화사지의 역사적 현황을 고고 자료��문헌 자료��설화 자료의 검토를 통해 살펴본 것이다�� 법화사지에서 출토된 명문 기와는 완도 법화사가 12세기 초에 재건되었고�� 1243년에 완도를 ‘거점 섬’으로 지정하고 법화사에 전략시설을 조성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1243년 당시 고려의 최이정권은 진도의 용장성에 도성에 버금가는 전략시설을 구축하고��이를 중심으로 완도와 압해도 등의 주요 섬을 연결하는서남해지역 ‘거점 섬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1247년에 백련결사의 2대 사주였던 천인과 그의 도반인천책 등이 몽골의 침략을 피해 ‘거점 섬’ 완도의 전략시설이 조성된 법화사로 들어왔다��그리고 그 즈음에 고려의 官人 이영이 유배형을 당하여 완도로 왔고��이영의 작은아버지 승려 혜일도 완도에 들어왔다��이는 ‘거점 섬’으로 지정되고 법화사에 전략시설이 조성된 직후의 일로서��당시 완도 법화사가 항몽의 공동체이자 법화신앙의 공동체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완도의 설화적 인물 송징은 완도에서 명멸해간 민중영웅들을 다면적으로 대변하는 복합적 캐릭터이다��따라서 역사화 과정에서 송징이 때로는 장보고로 치환되기도 하고��때로는 삼별초의 장수로 치환되기도 하는 것은 나름 정당하다고 할수 있다��근래에 법화사지 발굴에서 12�13세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됨에 따라 송징을 삼별초의 장수로 치환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