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과 티무르의 관계에 관한 연구는 그간 양국 간의 직접적인 상호 접촉 기록에 집중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양국 사이에는 명의 위소로 편성되어 있으나 고도의 자치를 누리는 여러 티베트, 몽골, 투르크계 부족 세력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몽골제국의 후속 세력이다. 명의 홍무제는 1387년에 티무르의 사신을 맞이하기 전부터 서북 변경에서 이 세력들과 십 수 년 간 접촉했으며 결국 그는 서북의 제 세력이 이들과 비슷할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는 사마르칸트의 부마티무르가 파견한 사신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점으로 접근했는데, 사실 그를 찾아왔던 사마르칸트의 사신은 사실 명의 서북 변경과 그 너머에 거주하고 있던 회회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홍무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티무르의 서신을 과장되게 번역하는 등 양국의 표면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오해를 키워 결국은 티무르의 분노와 원정을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티무르는 명 외에도 몽골리아 초원을 또 다른 원정의 목표로 삼았다. 그가 원정 직전까지 동반했던 보냐시리는 칼막에서 탈출하여 티무르에게 귀의했던 인물이며 티무르 사후 다시 몽골리아 초원으로 귀환했다. 그의 경력과 귀환 경로, 그리고 당시 티무르조와 동부 세력과의 관계를 종합해보면, 티무르가 후원하여 킵착 초원으로 되돌려 보냈던 툭타미시 칸을 연상케 한다. 티무르가 마와라안나흐르 북쪽으로 맞닿아 있는 조치 울루스의 우루스 칸을 몰아내기 위해 툭타미시를 킵착 초원의 입구인 시그나크로 파견했던 것처럼, 알타이 산맥을 사이에 두고 모굴리스탄 초원과 맞닿아 있었던 오이라트의 잠재적 위협을 무력화하기 위해 보냐시리를 몽골리아 초원의 입구인 에지나로 파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15세기 초 동아시아에서는 이처럼 명과 오이라트, 동몽골과 티무르의 이중적 遠交近攻 구도가 형성되어 충돌 일보직전까지 이르렀으나, 티무르 사후 내분의 시기에 명이 동몽골을 공격하는 틈을 타 오이라트의 세력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명과 티무르조의 갈등은 우호관계로 급히 선회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