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메이지 후기에서 다이쇼 초기의 ‘국민국가’ 형성기에 일본에 들어온 독일사상, 그 가운데에서도 ‘개인주의’가 근대일본의 지식인에게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일본에서 ‘개인주의’에 대한 논의는 19세기 후반에 니체철학을 소개하면서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서구윤리학의 조류를 흡수하면서 ‘도덕의 진보’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급격히 확산되어 가는 제국주의 발흥기에 도덕은 일본 사상가들에게 중대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우키타 가즈타미는 189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기까지 일본의 제국주의론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영국의 홉스, 독일의 니체 등이 기초는 삼는 애기와 독일의 피히테, 쇼펜하우어를 기초로 삼는 애타에 대해, 모두 극단적으로 달리는 도덕론이라고 평가하면서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는 중용 안에 도덕의 기초가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우키타는 제국주의가 일국의 독립을 완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세계의 문명 및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주의라고 규정하면서 반드시 침략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정의한다. 그는 제국주의가 윤리성을 강조한다면 사회주의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며, 20세기에는 ‘밖으로는 제국주의, 안으로는 사회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에 유행한 다이쇼 데모크러시에 나타난 대내적으로는 국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아시아의 패권을 요구하는 이중성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우키타의 윤리적 제국주의가 봉건적인 침략을 부정했다하더라도 일본의 전쟁논리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피할 수는 없는 이유이다.
이와 같이 메이지 후기부터 일본사회는 서구의 도덕 개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논의를 전개해왔다. 그 가운데 우키타는 기존의 제국주의론자들과 다른 특성을 보였지만, 일본이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면서 사상적인 전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지성인들의 사상적인 전환과 전이가 일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나아가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은 아닐까? 이후 전면적인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진정한 화를 위해 개인주의 및 개인을 국가에 복속시키고, 그 안에서 일본국민은 국가의 정책과 이념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는 수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