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까지 완주군 평촌지역을 지배하던 사찰들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불교배척이 강화되며 승려수와 토지면적이 줄어들었다. 유교세력이 1545년경 원평촌에 입향하고 그 후손들이 계속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으로 진출하였으며 이곳에 문중, 사우, 서원, 조상숭배, 족보 등을 통해 강력한 유교체제를 세웠다. 이들은 사찰들을 탄압하여 1600년대 초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절이 소유하던 토지들은 연안이씨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1820년대의 토지대장(양안)에는 대부분의 토지가 이미 연안이씨로 넘어가 있다.
입향조의 후손들이 늘어나고 강해지면서 기존의 성씨들이 점차 사라졌고 연안이씨 동족마을을 형성하며, 마을공간도 유교적으로 구성하였다. 앞산은 재실과 산소와 함께 조상을 모시는 곳이 되었고, 문중과 서원은 마을질서를 세우는 핵심이 되었으며, 집안에서는 가부장제가 강화되고 유교적 의례와 예절이 일상화되었다. 문중, 조상숭배, 산소, 서원, 족보를 통하며 유교적 부계혈족체제가 강화되었고 유교에서 배제되던 여성들은 민속신앙에 의지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도시로 나가 신식학교를 다니는 사람도 생기고, 도시로의 이주자도 생겼다. 신문물과 신식교육이 확대되면서 유교적 재생산이 점점 어려워졌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0년대부터 출향자가 급격하게 늘어났고 유교적 의례가 ‘허례허식’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유교의례와 조상숭배도 점차 약화되고 문중도 약화되었다. 1973년 마을의 가장 커다란 건물인 교회가 세워지면서 기독교문명과의 다툼이 치열해졌다. 하지만 이곳 기독교인들도 효도를 강조하고 차례나 제사에서 재배 대신 추도예배를 드려 기독교적 외피를 썼지만 유교적 관습과 많이 혼성되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