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물리학은 量子를 확인하고, 이를 추적한다. 물질의 가장 근원적 상태, 이로부터 形而下學은 거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셈이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해석의 과제가 제기되었다. 관찰과 검증의 물리학에 철학적 해석이 요청된 것이다. 그런데 量子가 모든 것의 기원이라면, 神은 어떻게 되는가? 정확히 모르는데 알고,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현대문명은 여기에 의존한다. 이런 양자에 비해, 동양의 세계 이해는 어떤가? 동양에는 일상적으로 말해온 氣가 있다. 분명히 있으나 알지 못하는 것, 동양의 氣 또한 여기에 속한다. 이에 글은 양자 이해를 위한 다른 방식의 하나로 氣에 대한 접근을 제안해 본다.
易은 관찰과 경험에 따른 曆法으로, 철학과 과학이 결합한 동양 고대 지식의 정수다. 이 중 상수역학은 氣를 주 대상으로 채택한다. 기의 본원은 음⋅양의 태극이다. 氣의 움직임에는 道가 있다. 易에서는 이를 ‘一陰一陽’이라 하고, 만물의 움직임은 결국 태극⋅음양의 자기 분화의 결과로 보는데, 이는 곧 ‘氣의 세계관’이라 하겠다. 여기서 氣는 ‘운동하는 形而上者’로 나타난다. 양자역학은 모든 것은 양자에 기초하며, 세상은 양자의 바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둘 사이의 세계관은 지극히 유사하다. 사람의 기운은 내적인 존재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외적인 기의 움직임과 얽히고 중첩된다. 이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사람의 운명은 드러나게 된다. 내적인 기가 외적인 기와 만나 운동하는 과정에서 세상의 천변만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기가 결정되면, 이치 또한 존재한다. 태극⋅음양에 기초한 五行의 氣는 기본적으로 相生⋅相克과 相比⋅相侮, 順逆과 制化 등으로 운동하는데, 이들은 ‘陰中陽⋅陽中陰’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로부터 命理는 通氣하여 막힘이 없는 中和의 상태를 최선으로 삼고, 분수에 맞는 욕구의 조절과 올바른 윤리적 실천을 요구한다. 곧, 命理를 말하면서 倫理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양자와 기, 둘 사이에는 상당한 사변적 유사성이 있다. 물리학은 물질 대칭의 끝에서 양자를 만났고, 동양철학은 理의 상대라 할 氣의 움직임과 만나 정신 대칭을 밝혀 왔다. 현대수학에서는 무한대의 실수 영역에 대응하는 허수를 말한다. 유에는 무가 그리고 정신에는 물질이 있다. 존재에 운동이 있고, 생에는 사가 있음과 같다. 문제는 이 모든 대칭성마저도 수렴하는 최초 또는 최종의 1자에 대한 접근은 서로가 다른 언어와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정신과 물질이 조화되는 지식학적 전환을 이루어야만 한다. 아직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 이런 상황에서 글은 동양의 氣 이론을 통해, 혹 양자론에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