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920년대 초반 일본과 조선에서 버트런드 러셀의 사회개조론이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었는지를 『개조』와 『개벽』이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동일한 사상가라도 그 사상가의 어떤 점이 강조되는지 또 사상가의 견해를 어떤 맥락 속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담론은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하며 전개된다. 본고에서는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 러셀의 개조론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개인, 인격, 개성, 문화 등의 개념들을 살핌으로써 1920년대 초반 개조론의 지형도를 그려 보고자 하였다.
먼저 『개조』의 경우, 당시 일본 대중의 요구에 응답하면서 동시에 『개조』라는 신생 잡지를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자로서 유명해졌던 철학자 러셀이 필요했다고 판단된다. 체제를 흔들 정도로 급진적이지는 않으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대중의 요구는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 즉 온건한 방식으로 취급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1920년대 초 『개조』에 러셀이 그만큼이나 많은 지면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러셀의 여러 면모 중 ‘과학적 철학자’로서의 모습이 강조되기도 하는데, 이처럼 당대 『개조』에서 선호한 것은 현실을 변혁하는 운동가 러셀이 아닌 객관적‧논리적‧과학적 차원에서 현실을 분석하는 철학자 러셀이었다.
이와 달리 김기전, 이돈화와 같이 『개벽』 주요 필진들의 글에서 인용되는 러셀의 목소리는 사회 운동가로서 러셀이 주장했던 것들이다. 그들은 러셀이 당대 사회가 ‘창조적 충동’이 충만한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동의하고, 이를 위해서 ‘문화’의 힘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문화 운동을 그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운동의 주체는 초기에 다수의 개인으로 상정되었으나 이후 소수의 지식인 계층 등으로 옮겨 가게 된다.
주목할 점은 『개벽』의 개조 담론에서 개인에 대한 상상은 이론적인 차원,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성에 치중되어 논의되었는데, 예술 특히 문학과 관련된 글들에서는 다른 양상의 개인이 출현할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사회개조 담론 속에서 희박해진 개인의 모습은 이렇듯 예술 내지 문학 속에서 새로운 자리를 맡으며 변화를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