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회에서 人身에 대한 포상과 징벌을 집행하는 방식 중의 하나가 거주 지역에 대한 인위적이며 강제적인 조치였다. 驛이나 섬에서 군현의 구성원으로 편입되는 것은 포상에 해당하지만, 일반 군현에서 향·부곡이나 섬으로 거주 공간을 임의로 변경시키는 조치는 대부분 범죄에 대한 처벌로 시행되었다. 특히 섬으로 추방하는 해도 유배는 내륙으로부터 격리와 단절을 뜻한다는 점에서 매우 수위가 높은 처벌이었다. 고려 시기에 해도로 유배된 이유는 역모나 반란, 살인뿐만 아니라 贓罪나 姦罪 등 다양하였다. 그런데 국왕에 대한 불경과 불충의 행위로 인해 해도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국왕을 시해한 자의 당여이거나 반역에 연루된 경우, 왕을 저주하거나 비난하는 불충한 언사로 인해 해도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왕실 조상의 능묘를 제대로 수리하지 못하거나 왕에게 결례를 범하여 해도로 방출되기도 하였다. 고려에서 섬은 어염과 목축의 재원이고 때로는 수군을 충당할 수 있는 지역이었지만, 그 지역 단위로서의 위상은 향·부곡보다도 낮았다. 게다가 위중한 범죄자의 유배지로 섬이 이용되면서, 도민은 죄인의 후손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섬으로 방출되는 해도 유배는 형벌 중에서 가장 기피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해도 유배가 신민을 규제하는 통제수단으로 상당히 효과적이었다는 사실은 섬으로 유배된 사람들이 느낀 두려움과 절망에서도 잘 드러난다. 국왕을 위협하거나 해치려 한다든지, 왕실의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는 반역이나 모반처럼 처형이 불가피한 최악의 ‘불복종’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불복종’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해도 유배는 불충을 징계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에서 불충죄는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赴擧權이 박탈되었고, 사면 대상에서도 제외되는 엄중한 범죄였다. 이처럼 국가 지배체제의 구조 속에서 해도 유배는 신민의 불복종 행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낙인과 같았다. 따라서 해도 유배는 징벌을 통해 국가권력에 대한 신민의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수단으로 매우 유효했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