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근대 이행기 일본에서 만연한 성병 특히 매독이 초기 군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고 정부는 이를 어떻게 관리하려 했는지를 검토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 제국의 길을 걸으면서 10년마다 전쟁을 치렀던 일본 군대에서의 성병 문제는 군사력 저하와 연관하여 심각한 수준이었다. 부국강병을 국가의 정책으로 삼고 있었던 메이지 정부는 계속되는 병사의 감소 원인을 병역 면제와 기피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전쟁이 발발하면서 병사 인원 문제는 감염병과 병사들의 성병에서 더 크게 발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육군성은 성병의 추이를 조사하여 성병 환자가 군대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성병으로 인해 군복무를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육군성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 육군의 성병은 병사 총수에 대해 천분율로 46.40‰를 점하고 있으며, 성병으로 인한 불합격자, 병역면제 및 제대자는 7‰에 달하고 있었다. 이에 육군성은 1908년에 응급법을 정하는 과정에서 성병을 주요 감염병으로 간주하고 성병의 종류 및 감염원인과 치료과정을 정확하게 조사했다. 일본 육군성은 성병 예방을 위해 사창의 이용을 엄하게 금지하여 외출제한구역을 설정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엄격한 정신교육과 콘돔 사용 장려도 병행했다. 이러한 육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대 내의 성병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육군은 이후 시베리아 출병, 만주사변 등으로 이어지는 원정 전쟁에서 위안시설을 설치하여 군인들의 성병을 관리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