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는 조선의 행정제도에서 행정 실무자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국정에 반영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하지만 왕의 운영 의지에 따라서 언로 정책이 달라진다.
윤대제는 조선 세종대 실시되어 조선후기까지 운영되었다. 윤대제를 살펴보는 것은 조선시대 言路제도가 운영적인 면에서 제도의 실시, 확대 혹은 축소를 통한 정책적인 면과 그 속에서 논의된 내용이 당시 정치 전반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다루는 것이 목적이다.
중종대는 윤대제가 한 달에 3번으로 고정되는 시기이다. 이 관행은 이후 지속되었다. 중종대 윤대제는 勳舊와 士林의 대립이라는 상황에서 정치적인 발언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성격도 변하였다. 중종 4년은 ‘君弱臣强’이 윤대에서 발언된 시기로 조광조 등 사림이 본격적으로 중앙에 진출, 중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날 때까지 윤대제는 본격적으로 확대되었다. 참여 관청의 확대 논의, 학식 있는 종친에 대한 윤대 참여, 소격서 혁파 건의, 천거된 일반 신하의 윤대 참여, 2품인 특진관의 윤대 참여 등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 이후 윤대 횟수와 성격은 축소되었다. 참여자도 억지로 참여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명종대는 윤대 자체가 정치적 성격을 띄기 시작하였다. 을사사화 당시 윤대에서 택현설(擇賢說)이 논의되는 등 정치적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알력 문제로 윤대제는 명종대는 간헐적으로 실시되다가 1586년(선조 19)에 폐지되었다가 선조 34년에야 다시 시행되었다. 즉, 정치적인 문제로 윤대제가 제대로 실시되지 못한 이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윤대는 형식상 존재하는 형태로 변하였다. 윤대는 조선의 행정제도에서 행정 실무자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국정에 반영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하지만 왕의 운영 의지에 따라서 언로 정책이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