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켈젠(Hans Kelsen, 1881-1973)은 2000년대로의 전환을 앞두고 1999년 뉴욕 타임스 매거진이 선정한 1000년간의 법학자로 선정되었을 만큼, 법의 본질을 극한적으로 분석한 업적을 남긴 법학자이다. 그의 ‘순수법학’은 해방 후 우리나라의 신생 법학의 원형을 형성하였을 정도로 우리나라 법학에 미친 영향도 크다. 켈젠에 관한 연구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의 출신지인 유럽(특히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물론, 영미권에서도 활발하다. 그 이유는 그가 실정법에 대한 (신학, 형이상학, 도덕, 정치, 경제 등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실증주의 법이론의 모범이 되었을 뿐 아니라, 법의 순수한 이론을 넘어서 오늘날 우리의 정치적 삶의 틀이 되고 있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는 정치형태에 대한 전형적인 정당화 이론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켈젠이 큰 역할을 했던 1920년대의 독일 ‘국법학 논쟁’은 국법학의 방법론과 헌법재판(‘헌법의 수호자’)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주제를 갓 청산한 독일ㆍ오스트리아에서 맑시즘의 큰 영향 하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바람직한 정치체제 내지 착근가능한 정치체제로 자리 잡을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여기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문제점이 지적되었고 그 해결책이 모색되었으며, 나아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어떻게 허망하게 붕괴될 수 있는가도 이론이 아닌 현실로 예시되었다.
켈젠의 이론은 종래 경험적 사실과 담쌓은 관념론적 이론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오히려 ‘과학’으로서 경험적 소재를 중시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이론의 측면도 짙게 가지고 있다. 켈젠 스스로도 자신의 이론이 관념론이나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의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했지만, 그러한 방향의 이해 내지 해석은 주류가 아니었다. 로버트 슈이트(Robert Schuett)가 최근 출간한 〈한스 켈젠의 정치적 현실주의 Hans Kelsen’s Political Realism, 2022〉는 켈젠의 현실주의의 면모를 생생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켈젠은 현실주의 정치이론가 한스 모겐소(Hans Morgenthau)의 스승이면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정치적 현실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켈젠의 이론뿐 아니라 그의 생애(의 일화)를 제시하는 전략도 구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켈젠의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물론 켈젠의 생애에 관한 새로운 전기적 자료를 광범위하게 발굴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켈젠 이해의 큰 진전을 이룬 노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켈젠의 유일한 여제자로서 최초의 미국의 여성 법학교수가 된 헬렌 실빙(Helen Silving) 박사 관련 일화도 소개되고 있어서, 이 책의 내용을 살피는 것은 실빙 박사의 배우자이신 월송 유기천 교수의 생애와 학문을 널리 알리고 기념하는데 힘쓰시는 강동범 교수의 정년퇴임을 축하하는 기고로서 의미가 없지 않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