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인 극의 특질은 ‘인간 상호 간’에 ‘현재’ 일어나는 ‘사건’을 ‘대화’를 통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 사건은 갈등을 중심으로 하며, 이 갈등이 얽히고 풀려가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이 과정은 긴장을 동반한다. 그러나 19세기 말로 오면 서사화된 극들이 나오는데, 이로 인해 극은 ‘인간 상호 간’에 ‘현재’ 일어나는 ‘사건’보다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어떤 ‘상황’에 처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독백’을 통해 드러내 보이는 것이 가능해진다. 극은 객관적인 ‘제시’를 넘어서 주관적인 ‘설명’까지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복근의 희곡은 이런 서사화된 극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의 희곡에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된 인물이 등장하며, 이 인물은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과거의 사건을 돌아보면서 독백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주목을 요하는 것은 그녀의 희곡은 독백뿐만이 아니라 무대 위에 살아 있는 인물처럼 형상화된 ‘죽은 인물’들을 등장인물들과 대화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죽은 인물들을 컨피단트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방식을 통해 정복근의 희곡은 현재보다는 과거로 가득 차게 되고 현재는 과거의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과거 회상으로 가득 차 있는 그녀의 희곡들이 극의 필수 요건이라고 여겨지는 ‘긴장’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지체’이다. 이러한 지체는 현재 일어나는 사건이 없고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건에 초점이 가 있는 정복근 희곡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원래 고전적인 극에서 플롯은 갈등을 묶었다가 푸는 과정이고, 이과정에서 긴장이 조성된다. 그러나 그녀의 희곡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것들이기에 더이상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희곡의 줄거리는 등장인물이 현재에 왜 그런 상황에 빠져 있는지를 서서히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분명히 뭔가가 일어났는데 그것을 파악하는 데까지 시간을 지체시키는 것, 즉 이야기-시간과 담화-시간의 차이를 벌림으로써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계속해서 유지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그녀의 희곡은 고전적인 극과는 다른 방식으로 긴장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정복근 희곡의 형식은 내용과 잘 맞아떨어지는데, 그녀의 희곡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과거의 사건은 지체를 통해 서서히 드러나면서 작품 전체를 이루고, 또한 이러한 지체를 통해 긴장감도 끝까지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