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정동을 “신체의 행위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변용이자 그것의 관념”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의 평행론에 입각해 이를 원용하자면, 인지적인 것이 정서에 작용하는 것과 같이 정념이 인지적 작용의 연쇄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떤 관념의 연쇄는 신체변용과 정서적 변이를 수반하며 정동적 반응의 도화선(trigger)이 될 수 있다. 텍스트-관념-신체변용-정동적 동요로 이어지는 연쇄를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 텍스트는 정동을 단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효과적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색하여 독자의 정동적 반응을 촉진한다. 즉, 문학 텍스트는 재현과 표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연쇄적으로 생성중인 텍스트-정동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텍스트가 재현이나 표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텍스트-정동이 된다면 우리는 텍스트의 전언과 더불어 이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선의 경우 이미지는 기성의 인식을 뒤흔들면서 정서적 변이와 정동적 동요를 촉발시키는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한편, 정동적 문학 읽기가 단지 정서적 태도나 정동적 주제를 탐색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텍스트의 이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지각과 배치를 만들어내며 그 자체로 사회적 삶을 살기 때문이다.
정동적 문학 읽기는 명료한 정보와 사회사적 이해에 기반한 비판적 독서가 아니라 삶의 구체성을 전달하는 정동적 언어의 효과를 드높이는 독서에 가깝다. 본고의 후반부에서는 1980년 광주를 다룬 황지우의 시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김숨의 연작 소설을 예시하여 정동적 문학 읽기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의 정동이 여러 신체의 연동의 결과이며 나아가 그 스스로가 여러 신체에 연동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