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에서는 기대승의 정치 활동을 재구성하고, 당시의 정국 속에서 그의 정치 활동이 가진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기대승은 기묘사림의 후예로서 가학에 입각하여 도학 사상을 근간으로 하였다. 그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척신정치의 청산과 사림 정치의 실현이라는 정치적 입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기대승은 명종말 문과에 급제한 후 정치활동을 시작하였고, 어린 연배에도 불구하고 신진사류를 대표하는 인물로 기대를 받았다. 이에 권신 이량으로부터 고담준론을 일삼는다고 탄핵을 받기도 하였지만, 이량의 실각과 함께 조정에 복귀한 후에는 신진사류의 중심으로 입지를 굳건히 하였다.
선조 초반 정국에서 명종대 권간으로 인한 구체제의 혁신을 둘러싸고 개혁에 미온적이었던 구신 세력과 개혁에 적극적이었던 신진사류의 갈등이 구체화되었다. 낭천제와 문소전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은 격화되었으며, 급기야 신진사류들은 또 다른 사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이 시기 기대승은 이황과의 협조 속에서 신진사류를 대표하여 정치 개혁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기묘사화 이후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하여 시비를 명백히 할 것을 요구하고, 사림의 정치적·학문적 정당성을 천명함으로써, 신진사류가 주장하고 있던 정치 개혁의 기반을 닦으려 하였다. 그는 문소전 문제와 같이 신구갈등을 촉발시킨 문제에 대하여서도, 개혁에 미온적인 구신 세력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이들로부터 신진사류의 중심으로 지목받았다. 결국 김개를 비롯한 구신 세력에 의해 축출될 뻔한 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적 위기의식 속에서 고민하던 기대승은 이황의 조언을 받아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정치 개혁은 이이로 대표되는 신진사류 중에서도 후진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