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속리산 속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복지동천 우복동에 관계된 설화의 특성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복동에 관계된 설화는 19세기 들어 별안간 출현하여 한반도 중부 지역을 무려 한 세기 이상 휩쓸었다. 19세기 당시 실제로 서울부터 청주, 충주, 상주까지 이르는 중부 지역에서는 우복동을 찾아서 복락을 누리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우복동이란 어떤 곳이며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서적까지 지어질 정도였다. 현재까지도 속리산 일대에는 여기가 진짜 우복동이라고 주장하는 장소들이 여러 곳 있다.
이 글에서는 그중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용유동 일대가 실제 우복동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로 한다. 먼저 18세기까지 이 일대는 불교와 유교의 영향력이 지배적인 곳이었다. 현재도 상당한 규모의 절터가 남아있다. 18세기 이곳에는 송준길의 후예들이 은거하여 생활하던 곳이었다. 노론의 핵심인물인 송준길과 그의 후예들이 조선 후기 차지하고 있던 지식인으로서의 영향력을 상정할 때 이 일대는 속리산 안팎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송씨 일가가 이곳을 떠나자 용유동은 황폐해지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19세기 들어 이곳을 중심으로 한 복지동천으로서의 우복동에 대한 이야기가 별안간에 출현한다. 1830년대 충주에 살던 이규경은 그런 현상을 상당히 자세하게 전하는 글을 연달아 짓고 있다. 그에 앞서 정약용은 우복동 같은 허황한 이야기에 속지 말고 공부에 매진하라는 상당히 긴 한시를 짓고 있다. 두 사람이 당대 지식계에서 가지고 있던 위상으로 보았을 때 당시 우복동 현상이 아주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정약용과 이규경의 기록을 중심으로 우복동에 관계된 설화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보았다. 이어서 19세기 당시 왕조의 몰락을 앞두고 횡행하던 복지동천 이념과 개벽 이념이 우복동 설화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우복동 설화는 당대인들이 단순한 설화가 아닌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특별히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