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후반 영광 법성창이 설치되기 이전에 법성포에서의 漕運활동은 수군진의 도움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한 모습은 우왕 9년(1383) 법성포 수군만호부가 설치되면서부터 시작되어 15세기 전반에도 법성진이 조운활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법성창이 설치되었고, 성종 원년(1470)에는 법성창에 조운선 39척과 조졸(漕卒) 780명이 배치되었다.
이렇게 법성창이 전라도의 새로운 漕倉으로 자리잡게 되자, 성종대에는 안전하고 효과적인 조운활동을 위해 법성창을 중심으로 다양한 陸運 移納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중종 7년(1512)에 법성창은 조운의 중심 고을이던 나주의 영산창을 흡수·통합하면서 전라하도 유일의 조창이 되었다. 이렇게 신설된 법성창의 위상이 높아진 이유는 법성포 조창의 우월적 입지와 함께, 고려 말엽 이래로 수군진의 조운 지원 활동의 중요성을 인지하였기 때문이었다.
15세기 전반에는 조운의 중심지인 전라도에서조차 조졸이 부족하였고 조창이 없는 지역에서는 船軍과 수군진이 조운활동을 수행하였다. 이런 점에서 15세기 법성진의 조운 지원활동과 법성창의 변천 과정은 조선 초기 ‘수군 지원 조운체제’의 대표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 초기 법성진(수군진)과 법성창(조창)의 관계는 이 시기 한국해양사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