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해석에서 정치철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정치철학적 명제를 법해석에서 활용하는 일은 어느 단계와 지점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입법에서 정치철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나 ‘법의 해석·적용에서 수학명제나 과학명제는 어떤역할을 할 수 있는가?’와 달리 대단히 흥미롭고 까다로운 질문이다. 본 논문은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진지한 수범의무라는 개념을 통로로 삼는다.
한낱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에게 법의 규범력은 적어도 (대표적으로) 판사와 같은 법 공무원이 그 법을 관련된 개인에게 적용되게 할 정치도덕적 의무가 있는 경우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법을 관련된 개인에게 적용되게 할 정치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려면 진지한 수범의무(진지한 법 준수 의무)를 고려한 법해석 원칙을 따라야 한다. 진지한 수범의무는 법 복종 의무와는 다른 것이다. 법 복종의무란 어떤 것이 법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에 복종할 의무이다. 어떤 것이 법이라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따라야 할 적어도 하나의 이유를 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법의 내용과 독립적인 의무이다. 만일 법 복종 의무가 있다면 법의 내용과 상관없이 이미 그 형식만으로 상당한 규범력이 이미 확보되어 있을 것이며, 정치철학은 법해석과 적용에서는 그 투입지점을 찾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적 법 복종 의무는 부당하며, 잠정적 법 복종 의무와 추정적 법 복종 의무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성립하기 어렵다. 설사 잠정적·추정적 법 복종 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구체적인 법을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따라야 하는지 문제에서는 아무런 실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법을 준수할 진지한 의무, 즉 진지한 수범의무는, 법의 내용과 자격을 고려하여 그 법을 준수하는 것이 모든 것을 고려한 당위와 일치할 때 법을 준수할 의무이다. 일반 국민과 법관은 법규범이 형성한 정당한 기대 위반과 관련하여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진지한 수범의무가 성립하는 사안은 다르다. 법관의 정치도덕적 의무의 영역은 법관에게 정치도덕적으로 허용된 영역과 일치한다. 법관이 정치도덕적 의무를 위배하는 경우 법관의 행위가 귀속되는 국가는 법규범을 발령하는 주체로서 수행적 모순을 범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 준수해야 하는 해석원칙은 다음과 같다.
진지한 수범의무를 고려한 법해석의 원칙: 공정한 고지 원칙과 제도화된 의사소통 원칙을 위반하지 않는 한 해석의 대상이 되는 법은 그 법의 해석에 적용될 수 있는 헌법규범을 매개하여 수범자인 국민이 진지한 수범의무를 질 수 있도록 해석되어야 한다. 공정한 고지 원칙과 제도화된 의사소통 원칙 때문에 그렇게 해석할 수 없는 경우에는 문제의 법에 대한 합리적 의사소통적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기회를 명확하게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의에 대하여 헌법에 의거하여 판정하는 최고심판기관의 재판관은 법관이 그 법을 국민에게 적용함으로써 정치도덕적 의무를 위반하지 않도록 헌법을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면, 법해석에 있어서 정치철학의 논증 활용은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공존과 공영을 위한 법을 매체로 하는 제도적 의사소통의 공동기획과 결부된 정당한 기대를 훼손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 때문에 정치철학적 논의는 다른 법해석의 방법들을 통합적으로 따르는 논증 속에서 다음 각 지점에서 적합한 형태로 정치도덕적 명제를 투입하고 그 명제를 근거 짓는 데 필요한 만큼의 역할을 꼭 한다: ⓐ 어떤 문언이 규칙인지 원리로 보아야할지 파악하는 지점의 일부, ⓑ 해당 종류의 사안에서 주장되는 해석카논의 활용 경계의 확정이나 순서가 정치도덕적 의무를 위배하는 것이 아닌지 확인하는 지점, ⓒ 광의의 체계적 심사 내에서 일반적·실천적 논증대화의 규칙들을 확인하고 도그마틱적 명제로 편입하는 지점. 둘째, 합리적 의사소통에 참여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구성원들의 근본적인 규범적 지위를 그 법체계가 부인하도록 하는 정치철학적 명제는 투입될 수 없다. 셋째, 헌법해석 단계에 적합한 정보의 제한과 충전이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구조적 정치도덕, 정치도덕, 개인적 도덕, 윤리의 층위 간에 성립하는 구성적 우선성 관계가 지켜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