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고려후기 특히 원간섭기 토지분급제의 양상을 분석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우선 고려전기의 토지분급제인 전시과제도가 원간섭기에도 유지되었는지 여부를 우선 검토하였다. 전시과제도는 .문무백관에서 부병한 인에 이르기까지 등급에 따라 토지를 지급한 제도였다. 때문에 통상 전시과로 분급된 토지를 2가지, 양반에게 지급된 토지와 군인 한인에게 지급된 토지로 구분한다. 원간섭기 녹과전과 사급전이 주로 관료들에게 지급된 토지이므로 본 연구는 양반에게 지급된 전시과 즉 양반전시과로 연구를 제한한다.
양반전시과는 크게 3가지 이유로 인해 원간섭기에는 관료들에게 지급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첫째, 전시과가 제정된 이후, 나라에 경사가 있어 양반들의 품계를 올려 주면 전시를 더하여 지급해 주는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고종이후 『고려사』에서 전시를 지급하였다는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둘째, 충목왕대가 되면 원간섭기 토지제도의 폐단에 대한 개혁이 요구된다. 이제현이 도당에 올린 글에는 토지제도의 개혁요구가 잘 반영되었고 충목왕 원년 도평의사사에서는 그에 따라 녹과전과 사급전제도를 개혁하려 했다. 그런데 이제현은 고려 전제 특히 관료들에게 지급하던 토지분급제의 개혁방안을 녹과전의 회복에 두고 있었다. 고려 전제를 잘 이해하던 이제현이 녹과전의 회복을 개혁방안으로 삼은 것은 전시과가 사실상 붕괴되어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조준은 전제개혁 상소를 올리면서 양반전시과 항목을 녹과전시라 명명하였다. 조준이 녹과전시라 명명한 것은 양반전시과가 이미 사라지고 녹과전이 양반전시과를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충렬왕은 집권 후 원에 親朝하여 홍다구와 같은 부원세력을 몰아내고 이어 왕권강화를 과거에 급제한 비문벌 관료들의 일부와 내료, 응방관계자, 겁령구 등을 등용했다. 이 과정에서 충렬왕은 녹과전 제도를 개정했는데 이때 개정된 녹과전은 토지 액수 등의 조정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총신 혹은 새로 발탁한 비 칙치 관원들에게 비옥한 토지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측근세력들은 이미 경기 8현의 비옥한 토지를 사패전으로 받은 뒤여서 자신의 사패전이 녹과전 분급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염려했다. 이에 충렬왕은 사패전으로 지급된 토지를 녹과전으로 지급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린다.
이때부터 측근세력들이 차지한 사패전은 녹과전 제도와 충돌하게 되었다. 충렬왕 재위가 길어질수록 측근정치는 강화되었고 왕위를 둘러싼 아들 충선왕과의 대립 과정에서 측근정치는 고려의 새로운 정치형태로 구조화되었다. 당연히 사패전은 더욱 확대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측근으로 권세를 누리던 이들은 사패전 주변의 땅을 탈점하기 시작했는데 탈점의 대상은 민들의 토지만이 아니었다. 관료들의 토지도 탈점의 대상이 되어 사패전은 녹과전을 침해하는 주요한 원이 되었다. 이에 국왕이 바뀔 때마다 탈점된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라는 교서가 내려왔으나 새로운 측근들은 과거 정적들이 자행한 탈점을 본받아 또 다른 탈점세력이 되었다. 이로부터 녹과전은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웠다.
충혜왕이 즉위하고 경기 사급전을 없애고 녹과전으로 지급하라는 지시를 내려 일시 녹과전이 회복되는 듯했으나, 충혜왕은 곧 실각하여 이러한 조치는 실행될 수 없었다. 충혜왕은 복위 후 더 혹독한 측근정치를 단행했고 공신의 사급전까지 빼앗아 차지했다. 이즈음 녹과전은 사실상 제 기능을 상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충혜왕이 폐위된 후, 가장 먼저 전민추정이 실시되었고 이제현은 당시의 시급한 과제로 정방의 혁파와 녹과전의 복구를 들었던 것이다. 이제현에 의해 주장된 이러한 견해는 王煦가 우승상이 되면서 국정에 반영되었다. 충목왕 원년 8월 도평의사사가 경기 8현의 토지를 양전해 녹과전으로 지급하고 사급전을 없애 직전으로 지급하도록 한 조치는, 사패전에 의해 침탈되어 온 녹과전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왕후가 우승상에서 물러나고 이제현의 개혁안은 후퇴한 채 정치도감이 설치됨에 따라 녹과전의 복구는 흐지부지되었다. 정치도감은 사패전과 관련된 폐단을 개혁하려 했고 탈점된 토지를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일은 했지만 사패전의 지급으로 축소된 녹과전의 회복을 계획하지는 못했다.
공민왕이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녹과전의 회복은 본격적으로 거론되지 못했다. 공민왕은 개혁에도 불구하고 공민왕 역시 측근정치로부터 완전히 결별하지 못했고 엄청난 수의 공신마저 책봉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녹과전의 회복이 논의된 것은 1388년 사전개혁의 과정에서였다. 조준은 경기 뿐 아니라 전국의 토지를 새로 양전하여 토지를 분급할 것을 주장하였고 녹과전도 여기에 포함되어 변화하였다.